(8) 쟁기 이야기2
(8) 쟁기 이야기2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5.04 04:58
  • 호수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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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트랙터로 논갈이, 밭갈이를 하지만 90년대까지도 쟁기로 밭갈이를 하는 것이 일반 적이었다. 지금은 사진속에서나 볼 수 있는 쟁기질 모습.
지금은 트랙터로 논갈이, 밭갈이를 하지만 90년대까지도 쟁기로 밭갈이를 하는 것이 일반 적이었다. 지금은 사진속에서나 볼 수 있는 쟁기질 모습.

보은읍 풍취리에 거주하는 이찬봉(74)님은'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아버지를 도와 쟁기질을 하였는데, 쟁기의 손잡이를 조금만 당겨도 땅 거죽만 긁으면서 막 지나가 논을 갈지를 못했고, 조금만 밀면 쟁기 날이 너무 깊게 흙속으로 들어가 소가 끌지를 못하는 등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잘못하면 논바닥이 기울어 아버지에게 핀잔을 많이 들었다'고 옛날을 회상 하신다.
인류가 처음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던 때에는 모든 일을 사람의 노동력에 의지하여 괭이나 따비와 같은 농기구를 사용했으나, 점차 인구가 증가하고 농작물의 재배 면적이 늘어나게 되면서 소형농기구만으로 땅을 가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괭이나 따비를 개량해 원시적인 형태이나마 쟁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쟁기는 처음 이집트에서 만들어져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우리는 다시 괭이와 함께 일본으로 전해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쟁기는'후치'로 평안북도의 고조선 유적에서 발견된 참나무로 깎아 만든 길이 140㎝의 눕쟁기가 있고, 기록상으로도 삼국사기에'지증왕 3년(502)에 소를 이용해 우경을 널리 보급하였다'고 되어 있어 우리 조상들은 이미 1천500년 전부터 쟁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쟁기의 보습(따비나 쟁기, 극젱이 등의 술바닥에 맞추는 삽 모양의 연장)은 처음에 나무로 깎아 사용하다가 돌보습을 사용했고, 법주사가 창건된 550년경에는 철 보습을 널리 사용했고, 그 후 100년이 지나서는 보습 위에 볏을 붙인 굽쟁기를 만들어 주로 사용했다.
쟁기를 끄는 방법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보은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남부지방은 소 한 마리가 끄는 호리 쟁기를 주로 사용했고, 강원도의 산촌에서는 소 두 마리가 끄는 겨리 쟁기를 사용했다.
겨리 쟁기를 소 두 마리가 끄는 이유는 돌이 많아 쟁기를 끄는데 힘도 많이 들지만 밭의 비탈이 심해 쟁기질할 때 두 마리가 서로 의지하면서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이유도 있었다 한다. 
그래서 소의 힘을 연결하는 멍에도 보은지방의 경우는 팔(八)자 형으로 둥그스름하나, 강원도 겨릿소의 멍에는 직선으로 고랑을 하나씩 사이에 두고 소 두 마리가 설 수 있는 길이로 했으며, 밭을 가는 농부는 두 마리의 소가 조화롭게 일을 할 수 있도록 고삐로 안소와 말아 소를 번갈아 부르면서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 외로움과 힘든 작업에 따른 피로를 이겨내었다 한다. 
또한 우리 조상들은 쟁기를 들어 옮기려고 성에 손잡이 아래에 박은 짧은 막대기를'잡좆'이라 불렀는데, 이는 쟁기로 땅을 가는 행위를 대지를 열고 정액을 뿌리는 것으로 생각해 땅의 여신과의 음양조화에서 비롯된 명칭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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