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쟁기와 흙징이 이야기 1
(8)쟁기와 흙징이 이야기 1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4.28 10:24
  • 호수 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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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군농경문화관에 전시된 쟁기의 모습. 소를 이용해 쟁기를 끌게 함으로서 논, 밭의 흙을 깊게 뒤집어 수확을 늘리고 농토를 확장했다.
보은군농경문화관에 전시된 쟁기의 모습. 소를 이용해 쟁기를 끌게 함으로서 논, 밭의 흙을 깊게 뒤집어 수확을 늘리고 농토를 확장했다.

요즈음은 4~5월이면 요란한 트렉터의 굉음이 농촌마을의 새벽을 뒤흔들지만, 1970년, 1980년까지만 해도 먼동이 틀 때부터 지게에 쟁기나 흙징이를 얹어 지고, 소를 몰고 논, 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모습이 우리네 농촌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보은지방의 오래된 농촌주택 헛간채에서 옛날에 사용하던 쟁기나 흙징이가 드물게 유물로 남아있고,'보은군농경문화관'에도 쟁기가 생뚱맞게도 강원도에서 소 두 마리가 끄는 겨리쟁기의 그림을 배경으로 전시 되어 있지만, 이 쟁기야 말로 우리 조상들이 1천500년 이상 굶어죽지 않고,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일등 공신중의 하나였다.
쟁기로 논, 밭의 흙을 깊게 뒤집어 수확을 몇 십 배로 늘렸고, 소를 이용해 쟁기를 끌게 함으로서 따비나 괭이로 농사지을 때 하고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농토를 확장했다. 쟁기는 본래 무기를 가리키는 잠개가 잠기로 바뀌어 20세기에 쟁기로 불리게 되었지만, 삼국시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쟁기는 다양한 지역성을 가지며 발전하게 되어 명칭 또한 지방에 따라 극제잉, 인걸이, 가대기 등 군(郡) 경계만 벗어나도 이름이 다르게 불리어 67종에 이를 정도로 다양하였고, 보은지방의 흙징이 또한 독특한 호칭이다.
그러나 쟁기는 크게 대별하면, 사람이 끄는 인걸이, 소 한 마리가 끄는 호리쟁기, 소 두 마리가 끄는 겨리쟁기, 개량형 쟁기로 구분된다. 또한 흙을 파는 보습이 달린 술과 소에 연결하는 성에의 각도에 따라 부드러운 밭을 가는 직각의 선쟁기(흙징이), 흙이 찰진 논을 가는 45도의 굽쟁기(쟁기), 거의 평행을 이루는 잡초제거용의 눕쟁기로 대별되는데 보은에서는 눕쟁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쟁기의 부분 명칭 또한 다양하나 대체적으로, 쟁기의 몸체인 술, 술에서 앞으로 뻗어나가 소와 연결되는 성에, 술과 성에의 각도를 조절하는 한마루, 술 끝에서 땅을 파는 보습, 보습 위에 달아 흙밥을 떠넘기는 볏, 쟁기를 들어 올리는 잡좆, 쟁기를 조절하는 손잡이로 부르고 있다. 쟁기의 각도는 처음에 한마루에 2~3개의 구멍을 뚫어 조절했으나, 점차 한마루를 쇠로 만들어 볼트를 조여서 각도를 조절했고, 술 뒤에 볏을 변형하는 쇠로 된 지렛대를 부착해 흙밥을 좌, 우로 자유롭게 떠넘길 수 있는 개량형 쟁기(굽쟁기)가 최근까지 많이 사용됐다.
비교적 단순한 선쟁기(흙징이)는 대부분 집에서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어 대장간에서 보습을 구입해 술 끝에 고정해 사용했고, 굽쟁기(쟁기)는 대부분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구입해 사용했다. 사용은 쟁기나 흙징이 공히 소의 목덜미에 멍에를 얹고 봇줄로 성애와 연결하여 끌게 하고, 농부는 쟁기의 손잡이를 잡고 고삐로 소를 독촉하면서 논, 밭을 갈았는데 많은 숙련도가 필요하여 쟁기질하는 정도에 따라 머슴의 세경(지금의 연봉)이 차이가 많이 날 정도였다.(다음주 계속)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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