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디딜방아 이야기
(1)디딜방아 이야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3.03 09:26
  • 호수 6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디딜방아는 절구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에 곡식을 넣고 함께 발을 밟아 고루  찧어주는 도구이다.(사진은 전남농업박물관 자료)
디딜방아는 절구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에 곡식을 넣고 함께 발을 밟아 고루 찧어주는 도구이다.(사진은 전남농업박물관 자료)

쿵~덕 쿵~덕 1천600년 이상 동네마다 울려 퍼지던 디딜방아 소리가 1960년대 발동기소리에 밀려 급격히 사라졌다. 디딜방아가 남아있을까 싶었는데, 보은에는 최태하 가옥과 최재한 고가(古家)에 비록 원형은 잃었지만 그나마 디딜방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디딜방아는 발로 딛는다는 디딜과 곡식을 찧거나 빻는다는 방아가 합쳐진 이름으로 이북 지방에서는'발 방아'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디딜방아를 사용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 고국원왕 때인 서기 357년에 만들어진 황해도 안악군 3호 고분의 동쪽 곁방 서벽에 디딜방아를 찧는 벽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측이 되고, 신라가 서기 470년 보은(와산)땅에 삼년산성을 쌓던 시대에 신라 땅에서 살았던 청백리의 상징인 백결(百結)선생이 섣달 그믐날, 떡을 만들기 위하여 온 동네에 디딜방아 소리가 울려 퍼질 때 곡식이 떨어져 굶고 있던 부인이 한탄을 하자 거문고로 디딜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해 부인을 위로했다는'방아타령'이 삼국사기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서기 400년경부터는 전국에 널리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어머니들의 고생의 상징이기도 한 디딜방아는 절구보다 대량으로 벼나 보리, 수수, 조 등의 껍질을 벗기고, 쌀이나 옥수수, 도토리 등을 빻아 가루를 만들던 획기적인 생활 도구로 동네마다 하나씩 만들어 공동으로 사용하다가 점차 부잣집을 중심으로 만들어 사용하면서 부(富)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디딜방아에는 얽힌 이야기도 많았겠지만 보은지방에서는 찾기가 어려웠고, 강원도 지방에서는 산에서 방아로 쓸 나무를 찾으면 좋은 날을 따로 받아 베어왔고, 좋은 날이 잡히지 않으면 나무에 금줄을 쳐 주인이 있음을 표시를 했으며, 나무를 깎아 방아를 만든 후에는 부적을 몸체에 붙여'방아 동티'를 막았고, 사고가 나지 않도록 고사를 지낼 정도로 신성시 했다고 한다.
또한, 전남지방에서는 음양의 화합을 상징하기도 하여 노래의 주제가 되기도 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한 지붕 아래서 두 명의 산모가 출산을 할 때는 늦게 출산하는 산모가 디딜방앗간에서 출산하여 태를 자르고서야 방으로 들어와 새로 태어나는 두 아이가 무탈하게 자라도록 액막이를 하는 장소로도 사용됐다고도 한다.
디딜방아는 크기에 따라 2명에서 6명까지도 함께 방아의 발을 밟고, 한명 내지 2명이 방아확(방앗공이로 찧을 수 있게 절구 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 앞에 앉아서 고루 찧어지도록 확의 곡식을 뒤집어 주고, 키질을 하였는데 공이는 껍질을 벗길때는 부드러운 소나무나 백양나무를 사용하였고, 가루를 만들 때는 단단한 참나무나 밤나무 외에 돌공이나 무쇠 공이도 사용하였다고 한다(다음 주에 계속 됩니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