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일제의 질곡
잊히지 않는 일제의 질곡
  • 보은사람들
  • 승인 2022.02.24 09:49
  • 호수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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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한 회(서울 여의도, 관기출신)

서기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국권을 잃고 일본에 병합된 경술국치로부터 1만2천771일 지난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에서 패전하여 우리가 만 35년간의 일제 식민통치 질곡에서 해방돼 광복을 맞아 나라를 되찾았다.
1945년 8월 6일 일본열도의 히로시마와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해, 8월 15일 정오에 일왕 히로히토가 연합국에 항복했던 지금으로부터 77년 이전, 우리가 조선으로 통칭되던 시대를 되돌아보면, 일제는 1937년 2월 '국어 상용'이라며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고 우리말을 못 하게 1938년에 조선어 교육을 폐지했다. 전쟁 말기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표' 몇 장씩 나눠주고 조선말 하다가 들키면 '표'를 빼앗기는 "표 뺏기" 벌칙도 시행했다. 이렇게 수난을 겪고 되찾은 우리말이 요즘은 외래어에 침식을 당하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1937년 10월에는 황국신민화운동을 벌여 1939년 10월에 강제 시행으로, 우리를 내선일체의 대일본제국 신민이라며, 일본인은 '내지인(內地人)'으로, 조선인은 '반도인(半島人) 또는 선인(鮮人)'으로 비하해서 불렀다. 1938년 2월 조선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시행하고, 1939년 9월에 조선인 노동자 강제 차출 동원을 시작해 조선인 장년들을 보국대나 북해도 탄광의 광부로 징용해갔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가 창 씨 개명제를 공포, 1940년 2월 강제 실시로 우리의 성명도 일본식 발음으로 고쳐 불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미국령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12월 8일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군 위안소가 설치됐는데, 1944년 8월 23일에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하여 12~40세의 조선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로 데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삼았다. 딸을 둔 부모는 정신대 보내지 않으려고 나이 열두 서너 살 된 어린 딸을, 신랑 집에 가서 자란 뒤에 혼례 치르는 '민며느리'로 보내기도 했다. 1942년 5월 조선총독부가 징병제도 시행 준비위원회를 설치하여, 1943년 8월 11일 징병제도 시행으로 1920년대 초반 출생한 조선 청년들이 남양군도로 징병 돼 갔는데, 거의 다 전사하고 전후에 생환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1944년엔 총동원법을 발동하여 재가 부녀자와 어린 소년들도 수시로 근로 동원해서 각종 사역을 시켰다. 열 살 안팎의 어린 학생들도 동원해서 늦가을 벼 벤 논바닥에 떨어진 나락 이삭을 줍고, 강변 자갈밭에서 마른 목화송이를 바르며, 식전 일찍 싸리비 들고 나가서 신작로 쓰는 일을 시켰다. 농촌에서 피땀 흘려 농사지은 식량용 곡식을 공출로 수탈해 가고, 개나 토끼 따위의 가축도 지정된 일시, 장소에 집결시켜 도살해 모피를 관동군 방한복용으로 가져갔고, 겨울철에는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서 가족 수에 맞춘 할당량을 바치게 하고, 일본군의 병장기 만들 재료로 쓴다며 가가호호의 놋그릇과 수저 등 쇠붙이도 다 걷어가 부득이 나무를 깎아 만든 수저로 음식을 떠서 먹었다. 일본군 군용연료가 부족해지자 송탄유를 만들 소나무 관솔을 산에 가서 따다 바쳐, 1944년에는 관기리 동단의 25번 국도변 산기슭에 송탄유 채취용 가마 2기를 설치해서 세 사람이 운용했다. 들판에서 자라난 풀도 일본군의 군마용 사료와 농작물 퇴비용을 따로 베어다 바쳤다.
이 당시의 주거 가옥들은 초가였기 때문에 집안에 수도나 목욕탕이 없고, 우물물을 길어다 쓰던 때여서 추운 겨울에는 목욕을 못 하여, 인체에 기생하면서 피를 빠는 '이', '벼룩', '빈대' 등 물것들이 많았다. 1944년 겨울철에는 학생들에게 주사약 만드는 데 쓴다면서 '이'를 잡아 오라고 하여, 옷섶에 달라붙은 '이'를 잡아 목화송이에 묻혀 차가운 실외에 내놓아 얼려서 달아나지 못하게 종이봉지에 싸서 학교에 가져가면 담임교사가 마릿수를 확인해서 장부에 기재했다. '이'는 8·15해방 후에 '디디티'분말 살포로 퇴치해서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다.
생필품이 부족했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일반가정 집안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도 경작지로 활용하여 화훼 대신 곡식이나 채소를 재배하게 했다. 그때 학교 운동장은 파 재껴 콩을 갈고, 교실 앞의 화단은 꽃이 아닌 오이를 심어서 열매가 맺히면, 방과 후 시간이나 휴일은 학생 당번을 정해서 번갈아 한나절씩 학교에 가서 오이를 지키게 했다.
1945년 여름철 휴일의 당번 차례 때 학교에 가는데, 교문 옆 둑 위에서 낫으로 풀을 베던 청년 한 사람이 앉은 자세로 땅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순간의 호기심에 옆으로 다가가서 들여다보니 풀숲에 괴상하게 생긴 뱀이 있었다. 몸길이 겨우 한 뼘쯤 되는 몸통의 목덜미에 머리가 둘이 달린 '양두사'였다. 구경꾼이 금방 모여들더니, 어느 사람이 "이 뱀을 살려서 서울의 동물원으로 보내자"라고 말하자, 다른 한 사람이 장터 상점에 달려가서 과자 담는 큰 유리병 하나를 얻어 들고 와서 그 병 안에 뱀을 집어넣은 일도 있다.
이 시대는 자동차도 귀했지만 휘발유가 부족해서 운전석 바로 뒤에 화덕을 달고 다니면서, 그 안에 참숯을 가득 채워 넣고 불을 피워 운전기사 조수가 풍구를 부지런히 돌려서 화염을 최대로 키운 열량으로 자동차의 기관을 가동시키는 '목탄차'를 운행하기도 했다. 일상생활의 운송 수단도 모든 짐을 지게로 져 나르고, 먼 거리나 무거운 짐은 소 등에 실어서 옮겼다.
1945년 7월 중순에는 강력한 태풍으로 주민과 행인들에게 여름철 시원한 그늘을 지어주던 수령 수백 년 된, 신작로변의 아주 큰 둥구나무들이 밑동의 뿌리까지 솟구쳐 부러지고, 지역 특산물인 대추나무도 이 해에 많이 고사하는 기상 이변의 자연재해도 발생했다.
1945년 8월 16일은 여름방학 중인데도 4학년 이상의 고학년 학생들을 동원해서 학교 정문 옆의 운동장 가에 방공호를 더 파느라, 학생들이 땀을 많이 흘리고 곧바로 동네 앞 냇물에 가서 미역 감고 학교에 돌아오자, 해방 소식을 먼저 들은 교사한 분이 웃으며 우리말로 "일본이 항복했다. 이젠 조선말 해도 된다"라고 했다. 지금까지 일본어로만 말했는데, 별안간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어서 잠시 동안은 어리둥절했다.
그 당시의 보은 관기는 4일과 9일이면 오일장이 서는 읍 다음의 큰 동네였지만, 전기가 없어 전화나 라디오 등은 구경도 못 하고, 어두우면 석유 등잔에 호롱불 켜고, 석유 배급 못 받을 때는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며 살았던 농촌이었기 때문에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한 것을 모르고, 그다음 날인 8월 16일 오전에 학교에 가서 방공호를 팠던 것이다.
해방이 알려지면서 주민들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긴 칼 차고 설치던 주재소(경찰관파출소) 일본인 순사 주임이 2~3일간 사무실 문 앞에 나와 기둥에 기대선 채로 먼 산만 멍하게 쳐다보고 서 있더니, 어느 날 밤중에 슬그머니 야반도주하여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우리를 괴롭힌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지금도 독도 영유권 주장 등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조선인을 강제징용으로 데려다가 노역을 시켜 이룬 군함도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더니, 이제는 사도 광산까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어 참으로 가증스럽다.
8·15해방에서 미군정을 거쳐, 1948년 5월 10일의 총선을 통해 국회가 개원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남북으로 분단된 강토에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1,129일 간에 많은 인명의 손실과 재산이 파괴된 불행을 또 겪었다. 이런 사실들이 모두 잊히지 않는 비참했던 우리의 실제 역사다.
고난의 시절에 자주 먹던 음식이 '빨암죽'인데 한글 사전에도 오르지 않아서,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념사업인 '말모이,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원고 수집에 2019년 10월 4일 E메일로 보낸 '빨암죽'의 명칭과 설명이 1111번으로 등록돼, 2021년 2월 11일 '시공사' 발행 사전의 초판 353쪽에 "빨암죽(표제어) 충청북도(사용지역) 표준어(품사) 겉보리를 씻어 말려서 맷돌로 갈아 채로 쳐 만든 가루에 쌀을 조금 섞어서 쑨 죽(뒷풀이)"이라고 실렸다. 이렇게 하여서 흘러간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버릴 뻔했던 우리 보은지역 고유의 음식 이름인 '빨암죽'을 문헌 기록으로 '말모이 다시 쓰는 우리말 사전'에 올려서 확실하게 살려 놓았다.
나라가 광복의 희수를 맞은 지금의 화려한 도시 생활에서보다도, 비록 왜정치하지만 태어난 자연의 품안인 고향에서 빨암죽 먹고 자란 어릴 적 삶이 훨씬 더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난 20세기 전반기에 나라가 없어 설움 받고 살았던 노년의 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떳떳하게 살고있는 1945년 8·15해방 후의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세대들에게 과거사를 똑바로 알려, 애국의 국가관을 공감하고 싶어서 지나간 시대의 몇몇 사람들을 여기에 기술한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십승지지 우리 보은이 일취월장 발전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고장이 되어, 현지의 주민들은 자부심을 가지며, 출향인들은 고향 자랑으로 보은을 더욱더 찬연하게 빛내는 날을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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