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면 세중리 출신 김일씨의 고향사랑
마로면 세중리 출신 김일씨의 고향사랑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2.01.13 11:47
  • 호수 6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수성가로 사업일궈 고향 마을에 성금, 지역 청소년에게도 장학금,
마을노인회에 25년간 전달된 것만 4천만원 넘어,
배추농사 폭삭 망하고 24살 때 농협빚 얻어 상경한 스토리는 성공담이 돼
자수성가로 사업일궈 고향 세중리 마을노인회에 25년간 4천만원을 후원하며 고향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주)광천 김일 대표의 모습이다.

주머니가 넉넉해도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리 살림살이는 빠듯한지, 이번 달 조금 덜 지출했다 싶으면 다음 달 여지없이 몫돈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
매달 그렇게 다람쥐 톱니바퀴 돌아가듯 한 달을 보내고 한 해를 보낸다.
겨우 시민단체나 복지단체 등에 후원하는 것으로 그래도 더불어 산다고 자족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삶이 녹록치 않을텐데 그럼에도 추운 겨울날 구세군 자선냄비, 적십자 사랑의 온도탑은 서민들이 한두 푼씩 내는 금액이 채워져 끓어오른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 달 살아내기가 힘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은 벌이가 시원찮아도 나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한두 푼이지만 기꺼이 성금함에 손을 넣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미소가 왜 그리 아름다운지.
이웃과 마음을 나누고 정성을 보태는 한해가 되길 희망하며 2022년 임인년 두 번째 인물로 마로면 세중리 중뜸이 고향인 ㈜광천 김일(64, 서울) 대표를 소개한다.
고향인 세중리 노인회에서 그동안 보낸 성금이 4천만원이 넘는다며 지난 해 12월 30일 세중리 노인회에서 공덕비를 세웠으니 방문을 요청해 고향을 찾은 김일 대표를 만났다.

#1982년 세중리에서 최초 시도한 2모작 실패
보통 배포가 크다, 배짱이 있다라는 말을 한다. 김일 대표에게 딱 어울리는 단어인 것 같다. 세중초등학교, 보덕중학교, 보은농업고등학교(현 충북생명산업고등학교 전신)를 졸업한 학력을 배경으로 김일 대표는 졸업하던 19살부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함께 2천500평 정도 논농사를 지은 평범한 시골사람이었다.
16살 때부터 흙징이질(쟁기질)을 했고 또 농고를 졸업했으니 농사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또 마을에서 새마을지도자를 맡아 전문기관에서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농업에 도전하는 면모를 보였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시도도 하지 않았던 보온 못자리를 마을에서 처음 시도해 주변으로 퍼지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농민으로 안착해가던 23살 때 그는 또다른 도전을 했는데 그것이 대형사고가 되고 말았다. 복사트럭이 들어갈 수 있는 논이란 논은 죄다 임대해 동네 어르신들의 도움으로 봄배추를 심었는데 폭삭 망했다.
당시 임대한 논만 1만5천평. 조건은 봄배추를 수확한 후 논을 갈아서 모내기를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모작인데 한 번도 경험이 없던 당시 2모작을 세중리에서 시도한 것이다. 남의 땅 1만5천평을 임대한 것도 모자라 주변에서 그 누구도 해보지 않은 2모작 시도는 간 큰, 보통 배짱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냉해를 입어 봄배추 농사는 실패했다. 겨우 건진 배추를 팔기 위해 동네에 김종천 이장집 등 3농가에만 있었던 경운기를 이용해 비포장 신작로를 달려 청산과 마로, 탄부, 삼승면을 다니며 배추를 팔았다. 그렇게 해서 손에 쥔 돈은 겨우 25만원. 당시 1천500만원 정도는 남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은 배추농사가 쫄딱 망한 것이다.
기꺼이 경운기를 대주고 직접 판매에 나섰던 동네 주민들에게 기름값은 고사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논갈아 모내기를 해주겠다는 약속도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엄마마저 돌아가신 24살에는 강원도 평창에서 감자농사를 시도했다 포기했다. 농산물로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쥐꼬리밖에 안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인력으로 안된다고 판단, 농촌생활을 접고 동네 주민의 도움으로 농협에서 200만원 빚을 내 무작정 상경했다.

#이 많은 건물 중에 왜 내 건물은 없나 도전정신 고취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리는 만무. 김일 대표는 시내버스 직원들에게 2시간 동안 밥을 퍼주면 담배와 점심밥을 먹을 수 있다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고작. 6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생하던 그가 취업자리를 찾아냈는데 그것이 서울에서 자리잡을 희망의 발판이었다.
서울에서는 동향이라고 할 수 있는 영동출신이 사장인 회사였는데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서 회사가 있는 종로3가에서 사는 곳인 장위동까지 6.98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다. 걷는 내내 김 대표는 이렇게 건물이 많은데 이중에 내 건물은 단 한 채도 없다. 왜 모두 딴 사람이 주인일까? 반드시 내 소유의 건물을 가져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도전정신을 불살랐다. 고향 세중리에서 남의 논 1만5천평에서 배추농사를 지었던 호기로운 배짱이 되살아난 것이다.
8년여간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영업 마케팅능력을 발휘해 회사의 성장에도 기여하며 자신을 채용한 영동출신 사장에게 최대한으로 보답했다.
그리고 여기서 키운 경영능력을 바탕으로 상경한 지 8년여 만인 1992년 1월 13일 드디어 자신이 대표인 전자제품 부품을 판매하는 사업체를 세웠다. 김일 대표의 인생에서 괄목할만한 성장기록을 쓴 것이다. 비록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자영업체를 소유했다는 것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늘 도전해온 김일 대표로 보면 어쩌면 당연한 성공담이었다.
지금은 전자제품이 다양하고 고급스럽고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접목된 제품으로 크게 발달됐지만 당시만 해도 가전은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정도였고 핸드폰도 벽돌 핸드폰일 정도로 전자제품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전자제품 시장이 확장일로에 있었던 상승기가 전망되는 시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일 대표가 세운 광천전자도 성장을 거듭했다. 서울에 올라와 담배 1갑을 받고 밥을 먹게 해준다고 해서 밥을 퍼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500원으로 호빵 1개와 우유1개 사먹으며 허기를 달래고, 7킬로미터 가까운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내달린 끝에 사업은 확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개인사업체에서 주식회사로 승격시켰다.
이제 그의 이름 앞에는 고향 주민들, 친구들 사이에서도 성공한 출향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고향에 감사한 마음으로 노인회에 후원
1997년 IMF를 맞아 모두가 고생했던 시기에도 김일 대표의 업체는 외풍을 덜타 나름 선방을 했다. 앞만보고 달려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김일 대표에게 IMF는 주변을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됐다. 나눔으로 IMF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한 것이다.
고향에는 세중리 노인회에 매달 20만원씩의 후원을 시작했다. 학생 6명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했다. 11년간 지급한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은 김일 대표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다 학생들과 연락이 끊겨 장학금 후원은 중단됐지만 세중리 노인회에는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한 번은 개인소유의 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할 때 직원들이 세중리 노인회에 송금하는 일을 잊었던 적이 있었는데 빼먹었던 개월까지 소급해서 한꺼번에 송금한 적도 있다. 25년간 후원한 금액이 4천만원을 훌쩍 넘는다.

고향 세중리 노인회에 후원하는 돈은 매달 지출하는 비용으로 여긴다는 김일 대표는 정신이 살아있는 동안 계속한다는 것이 자기 자신과 약속이라고 했다. 그 옛날 배추재배 실패를 이해해준 어르신들에게 감사함을 잊지 못하는 김일 대표는 이렇게라도 그 빚을 갚는 것이리라. 공덕비를 세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세중리 노인회나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읽힌다. 그 동네의 그 사람들이니 가능한 얘기다. 
김일 대표는 세중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서울에서 태어난 2남1녀의 자식들과 함께 세중리에 오면서 자신의 부모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자신이 고향에서 일하며 겪은 것 등을 얘기한다고 했다. 레퍼토리여서 자식들도 다음 단계엔 무슨 얘기를 전개할지 달달 외울 정도라며 부인 박은하씨도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뿌리가 세중리임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돌아가신 부모님 산소가 있어서 연례처럼 세중리를 찾습니다. 동구 밖에서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서 아버지 저 잘살고 있나요 묻기도 합니다. 고향에 와서 다시 저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고향의 기를 받아서 치열한 생활을 견뎌냅니다. 고향은 그렇게 포근합니다. 용기와 위안을 주죠."
김일 대표의 고향사랑이 뚝뚝 묻어있는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고향에 대한 사랑이 또 어떻게 나타날지 계속 귀를 기울이게 한다.

세중리노인회에서 세워준 공덕비 앞에서 부인 박은하씨와 기념촬영중이다.<br>
세중리노인회에서 세워준 공덕비 앞에서 부인 박은하씨와 기념촬영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