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월송1리 용천이, 김진묵 송덕비·송헌경 공덕비만 봐도 주민 성품 알 수 있어
(31)월송1리 용천이, 김진묵 송덕비·송헌경 공덕비만 봐도 주민 성품 알 수 있어
  • 심우리
  • 승인 2021.12.30 10:46
  • 호수 6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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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1리 마을회관
월송1리 마을회관

이번주는 보청천과 항건천이 만나 십마주강변을 이루고 있는 보은읍 월송1리 용천이를 소개한다. 
용천이는 옛날부터 만석꾼 부자가 살던 마을로 넓은 들과 풍부한 물을 담은 마을이라 해마다 풍요를 누리던 곳이다. 마을 뒷산은 달을 맞이하는 곶이라는 뜻으로 월 곶이라고도 불리어지던 곳이다. 월송1리(용천이)마을이야기를 듣고자 노인정을 찾아가는데, 상들(용천이 앞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안녕하세요?"인사를 하며 노인정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르신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어서 오세요. 어디서 오셨나요? 아! 네, 마을 소개 글을 쓰고 있는 양화용입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지요? 동지가 다가오니 날씨가 추워 질 수밖에요. 담소를 나누고 계시던 어르신 한분이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우리마을노인회장님과 총무님, 부녀회장님이 와 계시는데, 마을내력은 회장님께 여쭈어 보면 잘 아실 겁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방이 따뜻하네요. 네 우리노인정은 이 마을에 사시던 최동훈님이 노인정 터를 기증해서 현재 우리들이 잘 지내고 있답니다. 지금도 마을 분들이 최동훈님의 선행에 고마워하고 있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끝내 이름을 밝히지 않는 주민의 안내로 노인회장님이 계시는 곳으로 이동하여 마을내력을 듣기로 했다. 마을아주머니 안내에 따라 찾아가니 박영권(80)노인회장님과 임익순(77)총무님, 김금옥(68) 부녀회장님, 변종순님이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고 계신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하고 마을에 대해 소개를 부탁하니 노인회장님께서 마을내력에 대해 소상히 말씀해주신다. 

김진묵 공덕비. 김진묵님의 선행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1931년 주민들이 세웠다.

"우리 마을은 예부터 부자가 살던 마을이랍니다" "마을입구에 김진묵 송덕비를 보셨나요?" " 아~! 네 보고 오는 중이랍니다" "그 분이 만석꾼 부자였는데, 비록 부자였지만 혼자 사시지 않고 마을 주민들에게 많은 선행을 하셨던 분이랍니다" 조선시대 비서감흥을 지냈으며 자선사업을 많이 한 김진묵(1859~1919)은 마을에 기근이 오면 자신의 곡식창고를 열어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었던 분입니다"
마을입구에 있는 송덕비는 김진묵님의 선행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1931년 주민들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각은 팔작지붕과 다포양식에 화려한 장식을 더하고 비각내부 벽면에 16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점이 다른 비각에서 불 수 없는 사례라고 한다. 
또한 비각 왼쪽 현판은 1932년 윤명학이 쓴 것으로 일본연호가 아니라 동양전통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안내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둘레 경계망이 있어 비각내부를 살펴볼 수 없어 벽화를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1931년 당시 일본 연호는 쇼와였고 우리나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1897년은 광무, 1919년 이전에는 융희), 중국연호는 중화민국이었는데, 동양전통 연호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살펴볼 수는 없는 관계로 기록 할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다.
노인회장님과 총무님 부녀회장님의 주거니 받거니 마을자랑은 끝이 없을 정도다. 
"우리 월송1리 마을주민들의 선행에 대한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져 내려오는데, 지금 우리가 있는 노인정은 최동훈님이 30여 년 전 기증을 해서 지을 수 있었고 마을 회관은 송시용이라는 분이 부지와 건립자금을 희사해서 지금의 마을회관을 지을 수 있었답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지요. 우리 마을 주민들은 항상 그분들의 애향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답니다." " 아~! 그렇군요." "옛날 우리 마을은 못골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지금의 배다리 동쪽에 있었던 작은 연못이랍니다. 서낭댕이는 월곶이 동쪽에 있었던 서낭당을 말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답니다. 요댕이재는 탄부면 평각리 넘어가는 고개인데, 예전에 장을 보러가는 사람들은 그 고개를 많이 이용했던 고개랍니다. 금강이라는 곳이 있었는데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예전에 그 곳에서 금을 많이 캤었던 곳이라고 하더라구요." "아~! 그렇군요. 저도 월곶이에서 금을 캤다는 기록을 본적은 있는데, 위치를 찾을 수 없어 많이 아쉽네요." 
필자가 아는 체를 하니 옆에 있던 임익순 총무님이 한 말씀해주신다. 
"용천이산은 예전에 돌을 캐던 곳은 있었지요. 마을앞쪽에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답니다." "아유! 감사합니다. 날씨가 많이 차가운데, 어르신들 몸 건강하시고 오래사시기 바랍니다." 
어르신들과 작별인사를 마치고 노인정을 나와 마을을 둘러보는데, 용천이 마을도 세월의 흐름에 맞게 공동주택이 들어서고 상들 곳곳엔 보은특산물인 대추농장 하우스가 설치되어 있다. 

송현경 선생 송덕비, 송담공 10대손으로 마을회관 부지를 구입해주셨고  마을농지구입 시 많은 성금을 희사하여 마을발전에 기여한 공이 커 공덕비를 세웠다.

마을주위를 살펴보고 입구를 나서는데 길옆 작은 비석하나가 눈에 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는데, 송헌경 선생공덕비(宋憲京先生功德碑)라고 쓰여 있다. 송헌경(宋憲京)님은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담공 10대손이라고 한다. 마을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고 특히 마을회관 부지를 구입해주셨고  마을농지구입 시 많은 성금을 희사하여 마을발전에 기여한 공이 커 그 공을 기리고자 감사함을 표하는 마음으로 마을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다고 쓰여 있다. 은진은 지금의 논산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당나라 호부상서를 지낸 송주은의 후예라고 한다. 은진송씨(恩津宋氏) 병오보는 1664년(현종)때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주관하여 발행한 족보이다. 송시열과 먼 친척이자 친구인 송준길은 윤후와의 학문적 대립을 많이 했던 인물로 조선시대 성리학의 발전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들의 후손인 송시용님은 마을회관조성비를 희사하여 마을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고 한다. 
필자가 마을소개를 하기 위해 곳곳을 다니다보면 우암 송시열선생의 흔적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우암송시열의 이름이 3천회 이상이 거론된다고 하는 걸 본적이 있는데, 해동송자라는 칭호를 받은 송시열이 조선시대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끼진 인물인지 종종 실감을 느끼고 있다. 우암 송시열선생이나 동춘당 송준길선생 등이 예와 학문을 중시했던 것은 어쩌면 이이, 대곡 성운선생의 성리학과 사계(沙溪)김장생 선생의 영향이 커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며 마을을 나서는 데, 어느덧 겨울 해는 태봉산 뒤편으로 스믈스믈 넘어가고 십마주강변 건너 읍네 네온사인은 하나둘 반짝거리고 있다. 반짝이는 네온만큼이나 필자의 마음도 반짝이는 것은 아마도 용천이(월송1리) 마을 어르신들의 따뜻한 마음과 마을발전을 위해 스스럼없이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는 분들의 공동체 정신과 애향심의 온기가 전해지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마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금을 캐던 용천산을 바라보며, 보은의 앞날을 밝게 비쳐줄 산이 용천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보청천과 항건천이 만나 십마주강변을 이루고 있는 보은읍 월송1리 용천이 마을 전경모습이다.
용천산 전경. 옛날부터 만석꾼 부자가 살던 마을로 넓은 들과 풍부한 물을 담은 마을이라 해마다 풍요를 누리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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