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보은읍 금굴리, 소나무숲으로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내는 마을
(30)보은읍 금굴리, 소나무숲으로 한폭의 산수화를 그려내는 마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12.23 11:51
  • 호수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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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남쪽 2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금굴리는 보은의 관문에 자리 잡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을 뒤쪽으로 보은IC가있어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편리하고, 특히 마을인근에 조성되어 있는 보은농산업 단지는 1988년부터 우수한 기업들이 입주하여 성업을 이루고 있다. 또한 1998년 보청천변 환경사업소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고, 마을남쪽 2km지점에 국가 산업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시골 속의 도시 같은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금굴리는 은사들, 쇠푸니, 구량 마을이 통폐합되어 현재의 금굴1.2리를 이루고 있다. 오늘은 금(金)을 퍼내던 마을로 알려진 금굴리(쇠푸니 또는 금곡)를 소개하는 날이다. 오래전부터 보은지역역사에 대해 토론을 주고받는 형님과 함께 읍내 먹자골목에서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오늘의 소개 마을 금굴리로 향하는데, 겨울 날씨 같지 않게 제법 훈훈한 바람이 분다. 읍내를 벗어나자 보은IC까지 이어지는 4차선도로공사가 한창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300년은 넘음직한 소나무 80여구루가 은사들 모퉁이에 자리한 고즈넉한 마을 풍경이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아름다운 소나무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니 홍가들에서 놀러 왔다는 김정자(82세) 어르신과 금굴에서 60년 넘게 살았다는 조영순 (81세) 어르신이 다가와 무슨 일 때문에 오셨냐고 물으신다. 마을 소개 글을 쓰고 있는 양화용이라고 필자를 소개 하고, 마을에 대해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니 조영순 어르신께서 흔쾌히 말씀해 주신다. 예전에는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은 마을에 대해 크게 아는 것이 없답니다. 처음 시집와서 사는데, 12식구가 살았답니다. 새벽에 어르신들 보다 일찍 눈을 뜨면 그때부터 밤늦께 까지 일을 해야 했지요. 그때는 제일 급한 문제가 먹고사는 거였답니다. 부모님 공경해야지 자식들 먹여 살려야지 마을을 둘러 볼 생각조차도 못했다니까요. 그렇게 살았습니다. 조영순 어르신의  말씀이 끝나자 김정자 어르신께서 맞아요. 옛 날에는 왜 그렇게 어른들이 무서웠는지 모르겠어요. 어르신들 말씀이 곳 법이었고 하늘이었다니까요.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지만 예전 사람들은 그게 옳은 일인 줄 알고 대꾸한번 못하고 살았지요. 지금은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답니다. 먹을 것 흔하지 교통 편리하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는 거지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이렇게 좋은 세상이 되니 우리들은 너무 늙었네요. 그래도 어르신들이 계셔서 지금의 좋은 세상이 되었지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는 것이 자식들이나 후손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까 합니다. 필자도 어르신들 말씀에 한마디 거들고 쇠푸니로 발길을 옮긴다. 

#달이 떠오를 때면 골짜기마다. 금빛이 찬란하게 빛난다하여 금곡월(金谷月) 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
쇠푸니(금굴1리) 마을 회관을 찾아가니 마을 입구에 커다란 유래비가 있다. 보은읍 남쪽 보청천을 경계로 월송리, 서쪽은 매봉을 경계로 지산리, 남으로 한계천을 경계로 둔덕리, 북쪽은 뒷골을 경계로 접하고 있는 마을로 고려 때 금을 캐던 곳이라 해서 쇠푼이 또는 금곡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이 아홉골(뒷골, 서리골, 가장골, 용수골, 분터골, 골안,  장끼골, 여우골, 안골)로 형성되어 있어 달이 떠오를 때는 골짜기마다. 금빛이 찬란하게 빛난다하여 금곡월(金谷月) 이라고도 했다. 은사동은 난세 때 선비들이 태평성대를 기약하며 숨어 살던 곳이라 하여 은사동(뜰)이라고 부렸으며, 지금도 옛날 정자를 지었던 터가 마을입구에 남아 있다. 비석거리를 중심으로 쇠푼이 은사동, 분터골은 금굴1리로 안말, 새터, 구량이는 2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약480년전 순천박씨가 쇠푼이에 정착하고 이후 광주안씨, 영산 김씨가 정착을 하고 300년전 순흥안씨, 소계주씨가 은사동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후 다양한 직업과 인물들이 배출되어 전국각처에서 고향을 빛내고 있다. 

보은의 관문에 자리잡은 금굴리 마을. 은사들, 쇠푸니, 구량 마을이 통폐합되어 현재의 금굴1,2리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금을 많이 캤다고 하는 금굴리(金掘里)는 조선시대 말과 일재시대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마을 지도자들이 나서서 주민들의 기민(饑民)을 구제(救濟)했던 환난상휼(患難相恤)의 마을.
쇠푼이 유래비를 읽고 마을 옆에 조성되어 있는 산업단지를 둘러보는데, 공장마다 분주한 모습이다. 말 그대로 금을 캐던 곳이라 그런지 이곳 산업단지에 입주한 기업체들은 매년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기업들이 분주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산업단지를 뒤로하고 필자의 발걸음은 구량이를 향해 가고 있다. 비석거리를 지나 마을 입구에 웅장하게 서있는 유래비를 살펴보는데, 선량한 아홉 씨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구량이는 마을 뒤에 거북바위가 있어 금구리(金龜里)라고도 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금을 많이 캤다하여 금굴리(金掘里)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과 일재시대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마을 이장이었던 박일호(朴一浩)씨와 박원근(朴遠根)씨가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서편의 저수지 1만평을 개척하고 농경지 4천 평, 임야 2만7천 평을 마을재산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이 1993년 마을 입구에 공덕비를 세워 기리고 있다고 한다. 또한 만석거부 참봉(參奉) 안종건님이 1924년 흉년을 맞아 굼주린 주민들에게 기민(饑民)을 구제(救濟)한바 있어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을 중앙에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추모하고 있다. 금굴리 마을 유래비를 살펴보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어느덧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서쪽 하늘을 넘어가고 있다. 겨울 저녁노을에 비친 노송들이 은사들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어디선가 필자의 귓가를 쫑긋하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보은농산업단지. 1988년부터 우수한 기업들이 입주하여 성업을 이루고 있다
금굴 소나무 거리. 소나무 80여그루가 은사들 모퉁이에 자리한 고즈넉한 마을풍경이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듯 하다.
금굴1리 연못.
금굴 옛 저자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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