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보은읍 지산1리, 우암 송시열선생이 종곡에 있던 김수온 부조묘를 옮겼던 선학동 마을
(28)보은읍 지산1리, 우암 송시열선생이 종곡에 있던 김수온 부조묘를 옮겼던 선학동 마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12.09 10:14
  • 호수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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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날씨 같지 않게 따뜻한 바람이 숙고개를 넘는 필자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준다. 이번주는 학처럼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선학동(仙鶴洞)마을, 지산1리를 소개하는 날이다.  지산은 건질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지산리(芝山里)라 했는데, 천곡리(泉谷里), 두지리(斗之里), 홍계리(洪介里), 개경리(開慶里)를 통폐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산1리(원지산) 박종선(58)이장님 댁은 마을입구 장 고개 아래에 터를 잡고 계신다. 필자가 찾아가니 콩 타작이 한창이다. 마을 소개 글을 쓰려고 찾아 왔다고 인사를 건네니 반갑게 맞아 주시며, 일손을 멈추고 마을 안내를 해주신다. 
"옛날우리마을은 장고개를 넘나들며 보은 장을 다녔답니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길이 막혀 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우리 마을사람들은 장고개로 시장을 보러 다녔지요." 
이장님과 함께 장고개를 찾아가니 옛길 흔적이 희미하게 보인다. 
저 앞에 있는 소나무가 왕소나무인데, 일제강점기 벌채사업을 할 때에도 베지 않고 보호를 했다고 한다. 이장님께서 가르키는 곳을 보니 약250~300년 정도의 커다란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웅장하게 서서 마을을 내려 보고 있다. 고속도로 생기기전 장 고개를 넘나들 때면 저 왕 소나무아래에서 쉬어가곤 했지요. 마을사람들에게 추억이 깃든 나무랍니다. 박종선 이장님과 해어지고 원지산마을을 찾아가는데,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문인석(文人石) 두개가 필자를 맞아준다. 마을수호신처럼 서있는 문인석 옆에는 여러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고 정자하나가 선학동의 운치를 더해준다. 

#산림의 영수 우암 송시열선생이 학문에 정진하라는 뜻을 전하고자 仙學同 표지석을 세웠다는 마을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2001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약 330년의 물푸레나무가 마을의 역사와 풍해를 막아주는 듯 웅장하게 서있다.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는 1664년 현종5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김수온 부조 묘를 이곳으로 이전 증축할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이다. 당산나무 아래 돌탑이 있고, 그 옆 선학동(仙學同)이라 쓴 작은 표지석이 반쯤 흙에 묻혀있다. 표지석은 김수온 부조 묘를 이전할 때 학문에 정진하라는 우암 송시열의 뜻을 전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옛 사람들은 삶의 터를 잡을 때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를 심었는데, 지산리는 물푸레나무를 심었나 보다. 지산리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일정부분 족적을 남긴 마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종시대 한글창제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 신미대사의 동생 김수온의 부조 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필자의 마음이 더욱 들뜨는것 같다. 15년 전 김수온 부조 묘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또다시 찾아본다고 생각을 하니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아마도 보은지역문화를 아끼는 한사람으로서 우암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주민과 이옥분 (72)어르신에게 마을유래를 듣고 급히 발걸음을 옮겨 김수온 부조 묘를 찾아가니, 기대와 달리 실망감이 교차한다. 
김수온 부조 묘는 충북도 기념물(4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문화가 꽃피고 체제가 안정되어 국가 중흥의 시대를 살았던 성종에 의해 부조 묘가 조성되었고, 해동성국 송자라는 대우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학자의 관심을 받아 이전된 시설이라면 관리가 잘 되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07년 방문했을 때는 잘 관리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의 부조묘는 지붕이 세는지 포장으로 씌워져있고 여기저기 갈라진 모습에서 오랜 기간 방치된듯하여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부조 묘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분이나 역할을 하신 분들의 위패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모시는 시설이다.  김수온은 세종 때 의서(醫書)의방유취 편찬에 참여했고, 집현전 학사로써 한글탄생에 직간접 간여했던 분이다. 우리 후손들이 그분의 업적과 공적을 연구, 보존하여 계승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김수온 부조 묘를 보고 있으니 문득 보은과 연관된 역사적 인물들의 발자취가 생각난다.       
       
#문화가 살아있는 마을 지산리는 마을노래를 가지고 있는 문화마을 
김수온부조묘는1487년 성종(成宗)에 의해 종곡리에 세워졌으나 1664년 현종(顯宗)5년 우암 송시열선생이 지금의 지산리로 이전 중축했다. 우암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서 3천회 이상 거론될 정도로 조선시대 학문과 정치, 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던 분이다. 사림의 영수요. 성리학의 대가이며, 해동성국 송자(海東盛國 宋子)라고 부르는 인물이다. 정통주자학을 주장했고 조광조, 이이 등의 학통을 따랐다. 김장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그러다 보니 정통 주자학을 바탕으로 정직과 예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것 같다. 1659년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 복상문제로 한차례 예송(기해예송)을 겪었고, 15년 후 1674년 효종비 죽음에 또 한 차례 복상문제로 예송(갑인예송)에 휘말렸는데, 그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 그리고 한때 친분이 두터웠던 남인계열 윤휴와의 갈등을 심하게 겪었다. 결국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원자로 세우려는 숙종의 말을 거역하여 유배 중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던 사람으로 예와 정도에 철저했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송시열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은하고 많은 인연이 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송시열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윤휴인데, 송시열과 치열한 학문적 대립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윤휴의 외가 집이 보은 삼산리였고, 그의 외할아버지는 대곡 성운선생의 제자인 김덕민이다. 대곡 성운 선생의 학문을 접한 윤휴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난을 피해 보은삼산에서 잠시 살았다고 한다. 후금이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를 거절하는 조선에 군사를 보내 두 번째 침입한 것이 1636년 병자호란이다. 당시 윤휴와 송시열이 속리산 복천사에서 3일 동안 주자학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고 한다. 송시열은 윤휴보다 10살 위였는데, 토론 후 "나의 30년 독서가 참으로 가소롭다"고 자탄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윤휴는 학문이 깊었던 인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한때는 친분이 좋았지만 정통 주자학을 따랐던 송시열과 주자학에 비판적 견해를 가진 윤휴는 여러 차례 성리학에 대해 논쟁했고, 결국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인물이다. 
지산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의 숨결이 있던 마을로 지금도 지산노래가 전해진다고 한다. 북쪽에는 건질봉이 반공에 솟고/ 서쪽에는 등산바위 웅장하도다./ 남쪽에는 효자지의 창창한 물결/ 동쪽에는 속리산이 웃고 비치네. 마을 노래를 가지고 있는 지산리는 문화와 전통이 살아있는 선비마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을 어귀를 나오면서 문인석에 인사를 하고 뒤돌아본 선학동은 회룡고조(回龍顧祖)신선들이 사는 숲속정원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답게 보인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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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 기념물(4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 김수온 부조 묘. 부조 묘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분이나 역할을 하신 분들의 위패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모시는 시설이다. 세심한 관리가 필요해 보인다.
2001년 보호수로 지정된 330년된 물푸레나무. 옛사람들이 삶의 터를 잡을때 입구에 심었던 당산나무이다.
지산은 건질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지산리(芝山里)라 했는데, 천곡리(泉谷里), 두지리(斗之里), 홍계리(洪介里), 개경리(開慶里)를 통폐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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