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보읍읍 풍취리, 서낭고개가 있는 옛 부터 인심후한 부자마을
(27)보읍읍 풍취리, 서낭고개가 있는 옛 부터 인심후한 부자마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12.02 09:51
  • 호수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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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경상도지방의 특산물이나 조세길 역할을 했던 서낭고개(은고개)가 있는 풍취리를 소개하는 날이다. 
서낭고개는 현대적 길이 생기기전 화령, 상주목 등 경상도지방에서 청주 성(城) 또는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로 과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마을이다. 풍취리는 바람부리, 진설미, 두평, 산직리 등이 통폐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은읍에서 약2km 북쪽에 있는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이월봉(74세)이장님께서 콩 수확이 한창이다. 이장님께 마을소개를 부탁하니 일손을 멈추고 마을내력에 대해 자세히 말씀을 해주신다. 예전에 우리 마을은 뽕밭이 많았답니다. 지금은 마루들이 논으로 되어 있지만 제가 어렸을 때 만 해도 논보다는 밭이 많았지요. 상궁저수지가 조성되고 밭이 논으로 바뀌고 부터 벼농사를 주로 했지요. 벌써 60년 전 일인 것 같네요. 당시는 마루들에 풍년가가 끊이질 않았지요.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벼 베는 소리 등 들소리가 끊이질 않았답니다. 입담 좋은 선소리꾼이 구성지게 선창을 하면, 뒤 소리꾼들이 흥겹게 소리를 하곤 했지요. 그때가 참 좋았는데, 요즘은 볼 수 없는 풍경이랍니다. 요즘은 기계화가 되어 농사도 그리 힘들지 않고 편한 세상이 되었지만 4~50년 전만해도 농사일은 모두 사람 손으로 일을 했지요. 당시는 동내 사람들끼리 품앗이가 많았어요. 농사일이 힘든 일이다 보니 일꾼들이 함께 농요를 부르면서 힘든 것도 달래고 피곤함도 풀 곤 했답니다. 

#방아거리가 많아 일년내내 물레방아, 디딜방아 연자방아 등이 쉴 새 없이 돌아가던 마을  
우리 마을은 방앗간이 3개가 있었답니다. 그만큼 번화했던 마을이지요. 이장님의 마을 소개를 듣고 있으니 마을어르신들이 한분 두분 모여 드신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옛날에 마을 우물터였는데요. 지금은 우물물을 사용하지 않으니 흔적만 있고 어르신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이랍니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서있는 곳이 우물흔적이 있는 작은 공터였다. 이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김홍식(87) 어르신께서 옛날에는 청주나 상주를 오고가던 사람들이 서낭고개를 넘나들었지, 보은읍을 거치지 않고 우리 마을을 지름길로 해서 다녔어요. 특히 소몰이꾼들이 많이 다녔고 보름이 되면 서낭고개에서 소원을 비는 분들이 많았답니다. 지금도 가끔 소원을 비는 분들이 있답니다. 서낭고개는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던 곳이라 그리 불렀다고 해요. 그리고 연자방아는 50년대까지만 해도 있었답니다. 그때는 우리 마을이 풍족했어요. 김홍식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계시던 김영례(80) 어르신께서 내가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당시 기억이 나신다고 하신다. 특히 1980년대 마을에 큰 물 피해가 있었는데, 당시 물 피난을 진설미로 갔었다고 하시면서 그때는 고생도 많이 했는데, 옛날이야기가 되었다고 웃으신다. 아마도 1980년 대홍수 피해를 말씀하시는가 보다. 당시 보은읍 전체가 물에 잠겼었는데, 당시 4시간 강우량이 1,000mm넘게 왔고 강수량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기상관측 역사상 가장 많이 왔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같은 둑이 없었나요? 하고 필자가 궁금한 듯 물어보니 지금 같은 둑은 없었고 작은 물길만 있었다고 하신다. 이후 보은은 수리시설이 잘되어있어 몇 차례 많은 비가 온 적이 있었지만 큰 홍수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 홍수는 인간이 자연에 대항하여 이길 수 없지만 치산치수를 잘하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 사례였다. 
대왕샘이 있는 마을, 진설미 마을 안쪽에 작은 샘이 하나 있는데, 세조 대왕이 속리산을 가는 도중에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좋아 행궁(대궐터)에서 이 물을 떠다 마셨다고 한다. 지금도 물맛이 좋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삼년산성을 마주한 위치에 영산이 있어 배 산으로 하고 배산 아래 위치한 우리 마을은 신석기 시대의 토기와 신라 전·후기시대 토기류가 많이 발견되고 옛 주거지에서 와당과 청자, 백자의 파편들이 널려있어 마을 역사가 수 천 년에 이르렀고, 근세에 있어 동학군의 통로와 관군의 매복지로 활용되었으니 충청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이후 경상도의 조세와 문물이 서낭고개를 통했고 과거보러가는 과객들이 청주 목을 지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근대까지도 이들이 쉬어가는 주막거리와 마방이 있었고 마을을 벋어나는 길목에 은고개가 있어 이들이 쉬어가는 쉼터가 되었다. 1반은 바람부리로 세조대왕이 속리산을 가실 때 대궐터에 잠시 머무르셨는데, 마을 샘물을 길러다드셨다는 일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시 물을 뜨러 오면 세찬 바람이 불어 물을 뜨러 온 하인들이 날아가는 바람에 바람불이라고 했다고 한다. 2반 진설미는 1914년 통폐합되기 전 물을 가둔다는 뜻의 주지리(注之里)였으며, 배가 지나가는 꼬리란 뜻의 주지미(注之尾)로 불리어졌던 곳이라고 한다. 3반 마르들은 신기리(新基里)또는 새터로 불리어지다. 말뜸으로 불러지기도 했다. 60년대 마을 앞에 가시나무와 미루나무가 많았고 많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사방이 비옥한 경작지가 많아 농사짓기 편하고 곡식 생산량이 많아 두평(斗坪)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4반은 수복동이라고 불리었던 곳으로 1980년 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우와산(牛臥山: 소가 누워있는 형태)에 터를 잡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마을이고, 용바우소(沼)에서 물을 받아 배산 밑으로 물길을 트니 옥토가 사방으로 펼쳐저 세 개의 물레방아가 쉴 사이 없이 방아를 찧으니 마을은 항상 흥겨운 노래 소리가 드높았다고 한다. 

#삼국시대 신라군과 백제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유서 깊은 마을
풍취리 뒷산은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100여기의 고분군이 있는데, 신라군과 백제군의 전투로 전사한 장수와 군졸들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김영례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우와산(牛臥山)에 고려장터가 있었는데, 큰 바위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도굴되어 방치상태가 되었고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지난 회에 소개했던 신함리 옥랑정문이나 말 무덤 등 곳곳에 있는 우리 지역의 역사가 보존되지 않고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자꾸 든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 크고 작은 조상들의 숨결을 찾아내고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온전히 전해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기회가 오기를 기대하며, 마을을 나서는데 왁새보 자리는 공사가 한창이고, 어디선가 낙엽 타는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마루들.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벼 베는 소리 등으로 힘들고 피곤한 농부들을 달래던 풍년가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바람불이 유래비
서낭고개. 현대적 길이 생기기전 화령, 상주목 등 경상도지방에서 청주성 또는 한양으로 가는 지름길로 과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세조대왕샘. 세조대왕이 속리산을 가는 도중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좋아 행궁에서 물을 떠다 마셨다고 한다. 지금도 물맛이 좋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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