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우리동네 문화유산... 보은읍 장신리 초가지붕
(30)우리동네 문화유산... 보은읍 장신리 초가지붕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11.04 11:02
  • 호수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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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종 고가(朴起鍾 古家)
보은읍 장신리에 위치한 박기종 고가의 모습. 초가지붕이 정겹다.
보은읍 장신리에 위치한 박기종 고가의 모습. 초가지붕이 정겹다.

지금은 어느 동네를 가나 모든 집들이 지붕에 기와나 함석, 슬레이트를 얹고 있지만,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농촌마을은 한 두 집의 기와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볏짚으로 만든 이엉을 얹고 꼭대기에 八자형으로 엮은 용고새(용마름)를 얹은 초가집들이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나면 집집마다 마당에는 지붕을 단장하기 위하여 볏짚으로 엮어 놓은 이엉들이 수북이 쌓이고, 골목길에는 용고새가 용트림을 하였다. 동네의 장정들이 품앗이로 돌아가면서 지난해 얹은 이엉을 벗겨내고 새 이엉으로 갈아주고, 새끼로 묶고, 처마를 잘라 단장하고 나야 한해를 마무리하는 또 하나의 큰 행사였다. 그러던 초가집들이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슬레이트나 양철지붕으로 바뀌면서 이제는 어느 동네를 가나 초가지붕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보은군내는 아마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선곡리의 최재한 고가(제44호)나 보은읍 장신리의 박기종 고가(제18호)가 유일하게 보존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주 우리 동네 문화유산에서는'초가집'을 주제로 하고 장신 2리 비룡소(飛龍沼)마을에 있는 박기종 고가를 찾았다.
비룡소 마을은 원래 수한면 운천리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운천리 일부와 보은면 장신리, 신촌, 피촌리를 통합하여 장신리라 하다가 1971년 보청대로를 경계로 하여 분구되어 장신2리에 편입된 마을이다. 황건천이 동(東)으로 흐르다가 청소산에 막혀 남류(南流)하면서 깊고 큰 웅덩이가 만들어진 비룡소(飛龍沼)가 있어 마을 이름이 되었다. 박기종 고가는 사촌간인 박계흠 전 이장님의 전언에 의하면, 약300년 전 8대조가 지은 집으로, 1980년대까지도 안채와 사랑채 곳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채만 남아있으며, 안채는 정면4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초가집으로, 지붕은 앞쪽면의 경사는 완만하게 하여 햇빛이 잘 들도록 하였고, 뒤쪽 면은 급경사로 만들어 습기가 차지 않는다고 한다. 박기종 전 국회의원님이 태어나고 자란 이 초가는 대부분의 일자 집 들이 서쪽의 부엌으로 시작하여 안방과 건너 방으로 시작되는데 이 집은 동쪽에 부엌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양반집이 대부분 높은 대(垈) 위에 하늘로 뻗는 모습인데 비해, 이 집은 낮은 대 위에 남쪽의 처마가 길게 뻗어 내려 격조 높은 亞(아)자형 문살이 없다면 흡사 오막살이집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겸양의 미를 최대한 느끼게 한다. 신석기 시대에 움집이 만들어지면서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측되는 초가지붕은 농경시대 이후 주로 볏짚을 재료로 사용하였으나, 억새나 띠풀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초가지붕은 불에 잘 타는 볏짚으로 만들어 불에 약하고, 썩기 쉬워 매년 교체하여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단열성이 뛰어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새들도 처마 밑에 굴을 만들고 살면서, 겨울철이면 개구쟁이들의 밤참의 대상이 되던 시절도 있었다. 농촌의 초가지붕에는 여름이면 호박이 주렁주렁 열려 식구들의 반찬이 되었고, 가을이면 지붕위에 널려 있는 빨간 고추와 누런 늙은 호박과 달덩이 같은 박들이 가을 하늘과 너무도 잘 어울려 아름다운 농촌의 상징이 되었고, 고향을 떠 올리는 추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런 초가지붕이 1971년 시작된 농촌주택지붕개량사업으로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안동의 하회마을이나 경주의 양동마을, 아산의 외암마을, 제주의 성읍마을같은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유산이 되었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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