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보은읍 산성2리. 보은군 최초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민족정기가 서려있는 마을
(24) 보은읍 산성2리. 보은군 최초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민족정기가 서려있는 마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10.29 14:06
  • 호수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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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산성2리(잣미)를 소개한다. 산성리는 크고 작은 마을이 통폐합 되어 오늘의 산성리가 되었는데, 백봉(柏峰)으로 쓰고 잣미라고 읽는 것은 이곳에 잣나무 또는 측백나무가 많이 있었기에 그리 불렀을 것으로 유추를 해본다. 산성은 보은읍에서 청주방향으로 5km정도 떨어진 보은읍관문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니 반듯한 마을길은 넓고 잘 가꾸어져있어 마을사람들의 정갈함을 엿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마을을 방문하다보니 이제는 마을입구만 봐도 주민들의 심성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초입에 들어서니 커다란 마을자랑비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마을자랑비나 꼼꼼히 읽어볼 생각으로 길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천천히 읽어본다.  

#백제시대 축성한 노고산성아래 위치한 마을
잣미(柏峰)는 백제의 옛 성터인 노고산성(老姑山城)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해서 잣미, 백봉(柏峰), 산성리(山城里)라고 불리어지다. 1914년 송정(松亭) 구이목(九二目)을 통합(統合)하여 단일부락(單一部落)이 되기도 했으며, 내북면(內北面)에 속(束)했고 1947년 1,2구로 분할되기도 했다. 오늘날 행정구역 개편(行政區域 改編)에 따라 1987년 보은읍으로 편입(編入) 되었고 부안임씨(扶安林氏)를 비롯한 이씨(李氏),김씨(金氏),황씨(黃氏),송씨(宋氏),최씨(崔氏),박씨(朴氏),라씨(羅氏),천씨(千氏),배씨(裵氏),장씨(張氏),윤씨(尹氏)가 온정(溫情)을 나누며 세거(世居)하고 있는 평화(平和)스러운 마을이다. 유서(由緖)깊은 노고산성(老姑山城)은 백제(百濟)의 옛 성(城)으로 동쪽에 머리를 맞대고 있는 함림산성(含林山城)과 함께 요한화(要寒化)하여 4km동남쪽에 떨어진 삼년산성(三年山城)의 신라군(新羅軍)과 싸웠다고 하며, 오늘날 패망(敗亡)한 넋과 성곽이 거의 무너져 복원(復元)의 따뜻한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己未獨立萬歲運動)이 전국(全國)에 확산(擴散)되면서 우리 마을에는 이용기의사(李龍基義士)가 마을 청. 장년(靑. 壯年)을 이끌고 노고산성 정상(老姑山城 頂上)에 올라 4월8일 자시(子時)를 기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를 외치게 되었다. 이것이 보은군내 최초의 기미독립만세운동(己未獨立萬歲運動)이 되었다고 하니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정기(民族正氣)가 서려있는 마을이다. 일제하(日帝下)에서 찌들게도 가난했던 식민통치(植民統治)에서 벗어나 광복 후(光復 後)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運動)이 시작되면서 피와 땀방울이 엉켜진 고등채소제배(高等菜蔬栽培)를 비롯한 농가소득증대사업(農家所得增大事業)에 노력하여 군내(郡內)에서 최고 소득시범(最高 所得示範)마을로 새마을지도자 현지시범교육장(現地示範敎育場),외국인홍보(外國人弘報)마을이 되기도 하였고, 1976년에는 대통령표창장(大統領表彰狀)과 함께 하사금(下賜金)으로 육묘장(育苗場)1천300평을 매입(買入)하기도 했다. 1987년은 범죄(犯罪)없는 마을로 지정(指定)되어 선망의 부락(部落)이 되기도 하였으니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급변(急變)하는 세계화 국제경쟁력시대(世界化 國際競爭力時代)에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同),화합(和合)의 마을로 발 돋음하고, 고향(故鄕)을 사랑하고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농자(農者)의 앞날에 밝은 미래(未來)를 지향(指向)하며,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가꿔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자랑스런 잣미(柏峰)마을은 영원(永遠)토록 무궁(無窮)하리라라고 쓰여 있다. 

#마을 앞 연자방아가 오장들 곡식을 찧어 주던 정겨운 마을, 지금도 마을 앞 정자에는 소를 이용해 방아를 찌었던 연자방아 흔적이 있다.
마을 자랑비를 읽으며 산성2리 주민들이 노고산성을 아끼는 마음과 나라사랑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을 알았고, 산성의 보호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산성뿐만 아니라 보은군내 유물, 유적들이 보호되고 그 가치에 대한 인정을 제대로 받아 마을주민들의 염원이 실현되길 바라면서 어르신들을 만나기 위해 회관에 들어서니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계신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니, "어디서 오셨는지요?"하며 황공순(82) 어르신이 필자의 방문을 물어본다. "마을 소개 글을 쓰고 있는 양화용입니다. 식사들은 하셨나요? 이 마을에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지요?"하며 어르신들이 살아오신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하니 장재순(82)어르신이 말씀을 해 주신다. "21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답니다. 옛날 내가 시집올 때 우리 마을 앞에 연자방아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을 앞 정자에 가면 그 흔적이 있지요. 그 연자방아는 소를 이용해서 방아를 찌었는데, 지금은 아랫돌만 있고 윗돌은 없어졌답니다"하며 마을 소개를 해주신다.   

#물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고 알려진 유서 깊은 마을 
"우리 마을은 물이 풍부하고 좋아 인심이 후했답니다. 지금도 마을 위쪽으로 가면 버꾸 샘이라고 있는 데요. 그 샘은 마른 적이 없답니다." 옆에서 황공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재순 (82)어른신이 말씀을 이어가신다. "내가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요. 버꾸 샘은 마른 적이 한 번도 없었답니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말은 적이었답니다. 그리고 물봉이라고 있는데요. 물봉은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냈는데 신기하게도 물봉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조금 있으면 비가 내렸답니다." "물봉은 어디에 있는 거죠?" 필자가 여쭈어 보니, "산성정상에 있는 샘이랍니다." "산성위에 있는 샘을 물봉이라고 불렀군요?" "네!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 샘을 물봉이라고 했답니다." "그럼 그 샘의 용도가 기우제를 지내는 것이었나 보군요." 필자의 묵었던 숙제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노고산성 정상에 있는 샘의 용도가 궁금했는데, 이제야 그 궁금증이 풀리는듯하다. 물론 먼 옛 날 성(城)에서 살던 사람들이야 식수나 생활용도로 이용했겠지만 사람이 살지 않았던 1,500년 동안에도 메워지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마을 사람들이 재난극복용으로 천제를 지내는 용도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사는 조용한 잣미(柏峰) 마을
산성리 마을소개를 들으며 다시 한번 안타깝게 느낀 것은 젊은 세대들이 모르는 우리의 고유문화가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마을마다 8~90세의 어르신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문화를 발굴하고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작업이 좀 더 박차를 가해야 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 특히 마을마다 내려오는 풍습이나 문화 등을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기록되어지길 바라면서 가을 깊은 잣미(柏峰)마을을 나서는데, 형님! 하고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반가운 얼굴이다. 공직생활을 하는 후배는 주말에도 쉬지 않고 논 밭일을 하는 농부의 삶을 사는 부지런한 후배인데, 경운기에 콩 다발을 한가득 싣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필자를 맞아준다. "취재는 다하셨어요?" "마을 어르신들이 친절히 잘 가르쳐 주셔서 만족한 마음이야", 후배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을 앞 연자방아맷돌을 살펴보고, 평원들을 바라보니, 어느덧 추수가 끝난 논바닥은 하얀 공룡(벼짚)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마을자랑비
버꾸샘
산성2리 마을입구
연자방아간 자리
의사 이용기 선생 의열비
잣미마을 입구
잣미마을 전경
잣미 마을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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