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보은읍 죽전리 남다리 대장간
(24)보은읍 죽전리 남다리 대장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9.30 09:10
  • 호수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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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설용술 야장(冶匠)의 70년간의 일터
보은읍 죽전리에 남아있는 남다리 대장간의 모습. 설용술 어르신이 야장으로 지정받고 철을 달구어 두들겨서 연장이나 기구를 만들었던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옛날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장날이면 오래 사용하여 날이 무디어진 괭이, 호미, 부엌칼, 낫 등을 챙겨 남다리 부근에 있던 '남다리 대장간'을 찾아 맡기고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원한 막걸리와 정담어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해질녘에야 대장간에 들러 맡겨 놓은 농기구를 찾아 돌아오고, 어린 아이들은 부모님을 졸라 대장간에서 만든 스케이트 칼날을 판자에 박아 만든 간이 스케이트를 타느라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얼음판에서 살았다. 이번 주 우리 동네 문화유산으로 대장간을 주제로 하고 보은읍 죽전리에 남아있는'남다리 대장간'을 찾았다.
보은읍 죽전리는 조선시대에는 서니면에 속했다가 1895년 행정구역 통합때 이웃마을 대밭말과 광암리를 합쳐 죽전리(竹田里)라 하여 보은면에 편입된 마을로, 남다리와 보은교 사이 둔치인 보은로 70-12번지에 54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남다리 대장간'이 있다. 남다리 대장간을 운영하는 설용술(87)어르신은 2003년 10월 24일에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3호 야장(冶匠)으로 지정을 받으신 분이다. 야장은 철을 불에 달구어 두들겨서 연장이나 기구를 만드는 단조(鍛造) 장인으로 철장, 대장장이, 또는 딱쇠로 불리기도 한다. 야장은 연속극'주몽'에서도 등장하지만, 기록상으로 최초의 야장은 신라의 석탈해(昔脫解, 4대 탈해왕)로 되어 있다. 신라시대에는 철유전(鐵鍮典)이라는 관서를 두고 농기구나 무기 등을 제작하였고, 조선시대는 서울과 지방에 650명의 야장이 각 관서에 배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야장은 유철장(鍮鐵匠), 주철장(鑄鐵匠), 수철장(水鐵匠)으로 나누는데 조선 후기부터는 수철장만을 야장이라 하였다. 야장이 일하는 대장간은 풀무와 화덕, 모루, 정, 메, 집게 등을 갖추어 놓고, 화덕에 불을 피우고 쇠를 넣어 달군 후에 모루에 올려놓고 쇠메로 두들기고 물에 넣어 담근질을 하는 과정을 통하여 연장을 만들거나 벼르는 일을 하는 공간이다. 
설용술(87)어르신은 14살에 삼산리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던 최정전으로 부터 대장간 기술을 배워 73년이 넘도록 한길을 걷고 있는 대장장이로 1967년부터 삼산리에서'남다리 대장간'을 운영하다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평생 쇠메 두드리는 소리로 청각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로 대장간을 지키고 있다가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 문을 닫은 상태다.
부인 주광래(81)어르신은 "올해도 학생들의 대장간 견학과 실습을 하고, 간간히 일도 하셨는데 두 달 전 부터는 건강이 안 좋아 문을 닫고 있어요. 옛날에는 종업원 3명을 두고 보은군내 일을 거의 다 하였지요. 괭이, 호미 등 농기구와 부엌칼, 굴삭기(포크레인) 부품, 광산기계부품 등 안 하는 것이 없었어요." 하신다.
옛날 대장간에서 스케이트를 만들어 즐겼다고 말씀 드리니 "그때는 학생들이 다 우리 대장간에서 스케이트를 만들어 우리 수입도 좋았어요." 라고 덧붙인다. 왜 자녀들에게 야장의 일을 물려주지 않으셨냐고 여쭈어 보았다. 한마디로 "세월이 변해 이거 해서는 밥도 못 먹고 살아요"라며 쓸쓸한 표정을 지으신다.  보은의 역사인'남다리 대장간'이 하루라도 더 남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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