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가위에는
올 한가위에는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9.16 09:32
  • 호수 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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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한가위는 풍요로움의 상징일 것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가을의 시작점을 내 멋대로 한가위로 정해놓았다. 절기의 하나인 입추가 있거나 말거나, 나 혼자만의 가을은 한가위부터인 것이다.
사계절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계절 가을, 왠지 가을은 어디로 떠나고 싶은 쓸쓸한 계절이기도 하다. 나뭇잎이, 풀잎들이 하나둘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한다. 쓸쓸하지만 그게 사는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가 아닌지 모르겠다. 모든 생물이 그대로 있다면, 그건 생물의 본연의 모습은 아닐 터이다. 언젠가는 떠난다는 걸 알기에 더 치열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사물처럼 정지되어있다면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외할머니도, 나를 끔찍하게 아끼던 아버지도, 내가 자식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던 나의 반려견 은비도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들이 몹시 그립지만, 슬프지만 자연의 섭리인 걸 어찌하랴.
'슬픔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다만 슬픔과 더불어 사는 법, 슬픔을 무릅쓰고 사는 법을 배울 따름이다. 그로 인해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앤서니 그레일링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그렇다. 떠나고 없는 사람이, 은비가 그립지만, 슬프지만 나 또한 언젠가는 떠날 것이다. 내려놓을 줄 아는 지혜를 가을은 또 와서 가르쳐준다.
어릴 적 추억하면 그 속엔 늘 아버지가 있다. 한가위의 추억도 그렇다. 모든 것이 귀했던 어린 시절, 새 옷도 명절에나 얻어 입을 수 있었다. 설빔이 그랬고, 추석빔이 그랬다. 대목 장날이 오면 곡식을 팔아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자식들 새 옷을 장만하는 게 그때의 풍습이었다. 그해는 궁핍이 극에 달했었는지 새 옷을 장만하지 못했었다. 새 옷이 없다는 걸 안 나는 엉엉 울었다. 그런 나의 손을 잡고 말없이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사는 보따리 행상으로 옷 장사를 하는 집으로 향했다. 추석 전날 밤이었고, 소복이 소복이 달빛이 내리는 밤이었다. 달빛에 아버지의 그림자가 더 크게 느껴졌던가.
이번 한가위엔 나에게 고운 추석빔을 해주던 아버지를 찾아 산소에 갈 것이다.
옛날처럼 푸짐하게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고 친척들이 함께 모여 풍성한 그 옛날의 추석은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가족끼리의 모임도 제한 적이고, 이제는 각자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대의 흐름도 한몫을 했으리라.
나를 외지에 보내놓고 밤이면 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며 너무 보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는 그리운 아버지, 자식이 돌아오는 명절을 몹시도 기다렸을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의 마음으로 명절이면 돌아오는 자식을 기다린다.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하지만 오직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어미 아비의 마음일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하지만 오직 변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다면 천륜을 져버리는 일일 것이다. 뉴스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한다. 또한 인륜을 져버리는 일 또한 그러하리라. 
추석이 그냥 며칠 쉬는 그런 추석이 아니라 가족 간에 이웃 간에 안부를 묻는 서로를 돈독히하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김 철 순(시인, 관기약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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