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효자정문이 있는 마을 보은읍 장속1리
(17)효자정문이 있는 마을 보은읍 장속1리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8.26 10:41
  • 호수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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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을지형이 노루머리처럼 생겼다고 노루실 또는 장곡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조용한 마을 장속리를 소개하는 날이다. 장속리는 보은읍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전원마을로 모정리, 내동, 소지동을 통폐합하여 오늘의 장속리가 되었다. 예전엔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분구가 되어서 70여 호 150여명의 주민이 오손도손 살고 있는 효자마을로 유명한 지역이다. 마을입구에 있는 효자정문과 효열비는 이 마을이 옛 부터 충효사상이 높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앞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효자정문은 선조시절 중수되었다고 한다. 마을회관을 방문하기 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효열 문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어 보는데, 신 평인 이몽경이 부모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병환중인 아버지를 5년간 간호하는데 죽은 참외덩굴에서 참외가 달리고 옥천강가에 얼음이 갈라져 한겨울에 잉어가 솟아올라 잡아다가 아버지를 봉양했다는 일화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고,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선조 때 명정되었으며, 1645년 인조 23년 후손에 의하여 중수 되었다. 라고 쓰여 있다. 그 옆 비문에는 신평인 이취신의 부인 남양홍씨의 비석인데 열행이 돈독하여 1729년 영조5년에 명정되어 이몽경의 정문 앞에 나란히 비를 세웠다고 한다. 1978년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효열비는 이몽경의 효 사상을 널리 알리려는 듯 효열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도토리가루를 끓여서 먹던 시절 이지만 효자가 많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인정이 넘치던 마을
옛날에 먹을 것이 없어 보리딩기를 먹고 살았어요. 그것으로 떡을 해서 먹었는데, 생김세가 거무스름해서 개떡이라고 했어 그 떡이 얼마나 거친지 목으로 넘어가질 않았다니까요. 그렇게 살았답니다. 필자가 마을 소개 글을 쓰려고 왔다고 하니 김순례(83세) 어르신께서 옛 추억이 떠오르신지 묻기도 전에 어렵게 살았던 이야기를 해주신다. 그리고 도토리 가루도 끓여서 먹기도 했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는데 70년대 통일벼가나오고부터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 했지 그때 생각하면 지금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세상이라니까요. 아~글세!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하면 쌀이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드시면 되지 왜 굶었는냐고 한다니까요. “아이고!" 보리개떡도 식구들이 많아서 눈치 봐가면서 먹어야 했어, 그거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더라구 우리 마을은 특별한 벌이가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대부분 마을 뒷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 팔았어요. 옆에서 김순례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있던 황복림(86세)어르신이 나도 한마디 해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말씀을 하신다. 하루는 모래봉에서 정신없이 나무를 하는데, 통로가 하나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이게 무슨 통로인가 하고 살펴봤더니 주위에 여러 가지 살림살이가 있어 이상해서 어른들에게 물어 보니 옛 날에 그곳이 고려장이 있었던 터라고 하더라구요. 그 다음부터 그곳은 가지 않았답니다. 다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었네요. 모래봉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고 필자가 궁금한 듯 여쭈어 보니 최성예 (77세)어르신께서 충초리 마을 뒤에 있는 산이 모래봉이라고 하신다. 나름 지역지명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필자도  모래봉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 내심 궁금하기도 하고 고려장이 있었다니 고려장의 모습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다.

#아버지에게 혼나면서까지 친구의 어려움을 함께했던 시골처녀
말도 마세요. 보리딩게고(보리겨)머고 11식구가 살았는데, 매일매일 끼니때가 되면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게 문제였답니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나 한날은 나무를 한 다발해서 머리에 이고 불종대(삼산리 나무시장) 밑으로 팔러갔는데, 나무가 팔리지 않았어요. 다시 가져 올수도 없고 해서 늦게까지 기다렸다. 어렵게 팔아가지고 집에 오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야단을 치시는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니까요. 이름을 가리켜주지 않는다던 어르신이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옆에 있던 최정자(79세)어르신께서 맞아요. 나도 옛날에 나무를 해다 팔기도 했었지, 마을뒤산에 올라가 나무다발을 이고 장에 가서 팔아 친구들을 도와주기도 했었지 하시면서 옛 생각이 나시는지 지그시 눈을 감으신다. 최정자 어르신의 나무 팔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던 주위 어르신들이 저 집은 옛날에도 잘 살았는데, 옆집 친구네 도와준다고 처녀 때부터 나무를 하러 다녔어요. 아~그러셨군요. 아가씨 때 산에 나무하러 다니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요. 하고 필자가 되 물으니 그렇게 됐어요. 하시면서 웃어넘기신다. 보은향약이 유명했다고 하더니 향약의 4대 덕목중 하나인 환난상휼(患難相恤)이 어르신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었나 보다. 아버지에게 혼나면서까지 친구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했던 시골처녀는 어느덧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있었다.

#아직도 시골인심이 살아있는 마을
한 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스님한분이 들어오신다. 백중제사를 모시고 과일 등을 어르신들에게 드리려고 오셨다고 하시면서 봉송을 내려놓고 가신다. 떠들썩한 마을회관이 궁금했는지 김정숙 부녀회장님(68세)께서 들어오시며 머가 이렇게 재미있으세요. 저도 끼워주세요. 하시면서 환한 얼굴로 방문을 열어보신다. 평소 김정숙 부녀회장님의 부지런함을 알고 있는지 어르신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길 오늘 사과 작업하는날일 텐데, 일은 어떡하고 오셨냐고 걱정들을 해주신다. 일차작업해서 지금 막 공판장에 보내고 잠시 들렀다고 하시면서 불편한 것 없으시냐고 어르신들에게 일일이 여쭈어보신다. 불편한 것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과일을 가져가라고 하시면서 스님이 가지고 온 봉송을 챙겨주신다. 미안해하며 어르신들 드시라고 극구사양을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필자의 생각이 이 마을은 인정이 살아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느꼈다. 부녀회장님께서 바쁘다며 떠나시니 어르신들이 부녀회장님에 대한 칭찬이 대단하다. 평소에 부녀회장님께서 많은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열녀가 따로 있는 게 아닌듯하다. 마을어르신들에게 잘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봉사하는 김정숙 부녀회장님 같은 분들이 현대사회 열녀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르신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었다. 인사를 하고 마을을 들러 보기위해 회관 뒤 느티나무를 바라보는데 담배를 찌던 황토 흙 건조실이 눈에 들어온다. 실로 오래 만에 보는 건조실이다. 반가운 마음에 사진한 컷 찍고 마을 유래비를 보니 조선 중종 때 신평이씨 이광조공이 마을에 입향하여 개척하였으니 500년이 넘었다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방앗간이 보인다. 이 마을은 아직도 곳곳에 정겨운 옛 풍경을 담고 있었다. 마을소개를 열심히 해주신 황복림(86세)어르신 .최성예(77세)어르신. 김순례(83세)어르신. 김정숙(68세)부녀회장님에게 다시한번 지면을 통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양화용(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보은읍의 서쪽에 자리잡고 15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효자마을 장속리의 모습이다.
옛날 방앗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장속정미소.. 마을 곳곳에 아직도 정겨운 옛 풍경을 담고 있다.
부모 섬김에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효열비는 이몽경의 효 사상을 널리 알리려는 듯 효열정문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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