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美學)
느림의 미학(美學)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7.2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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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다. 빠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든 시대, 뭐든 선택받기 위해선 빨라야 한다. 기술과 산업의 발달도 결국엔 누가 더 빠르게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경쟁으로 가속화됐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시간도 덩달아 쏜살같이 흘러간다. 그 질주하는 변화와 치열한 속도의 복판에 서 있는 우리들의 삶은 더 바쁘고 늘 분주하다. 뒤처지거나 낙오되지 않기 위해 주저 없이 달리고 목적 없이 휩쓸렸다. 그렇게 뛰어다니며 따라가고, 앞서가며 흘러간 시간, 지나고 보니 남는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현실의 무게만 켜켜이 쌓여있다. 소모되고 낭비되어 돌아갈 수 없는 날들만 저 멀리 저물어 갈 뿐, 마음의 허허로움은 세월을 앞질러 짙고 무겁게 드리운다.
빠르다는 것과 같은 말은 조급함과 서두름이다.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빨리빨리"라고 한다. 급속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마주했던 무너지고 갈라지고 끊어진 많은 것들은 모두 빨리빨리 가 만들어낸 결과물들이었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1882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처음엔 공사 기간을 200년으로 예상했는데, 가우디 사망 100주년인 2026년에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성당이 지어 지고 있는 동안에도 해마다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든다. 공사비는 관광객의 입장 수입과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첨단 과학과 최신 기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예술의 결정체인 건축물이 느리게 느리게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십장생 중의 하나로 동물 중에 가장 오래 산다는 거북이는 느리다. 가끔 농장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멈춰 있는지, 움직이는지 가늠하기 힘든 달팽이를 만나게 된다. 그들의 속도를 지켜보면 가끔은, 그 느림과 단출함이 부러울 때도 있다.
빠른 게 진리요, 생존의 기준이 된 요즘, 느리게 가는 삶의 시간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다. 어쩌면 멈춤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것도 멈추기는 쉽지 않다. 대신 조금 느리고 가볍게 가는 삶을 선택해 보면 어떨까?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슬로시티'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빠른 사회를 벗어나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조화와 여유를 추구하는 느림의 철학을 실현하는 지역을 24개 항목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해 선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7년 12월에 전남 담양군 창평면과 장흥군 유치면· 장평면,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중도등 4개 지역이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16개 시군이 지정돼 있다.
느림과 기다림의 여유는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잠시 멈추고 바라본 세상은 무궁무진의 우주다. 얼마 전부터 정신이 나간 것처럼 한눈을 팔거나 넋을 잃은 상태를 말하는 '멍 때리기'가 대회까지 열리며 주목받고 있다. 세상을 바꾼 창의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있는 상태에서 탄생했다. 느리게 가야 할 삶의 이유다. 바쁘고 허덕이는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하늘을 올려다보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먼 산 바라기를 할 시간 정도는 거뜬히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어야 한다.
빠르다는 것은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다른 느린 것들을 희생양 삼아 치고 나가야 하며, 빠르지 않은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어 버린다. 빨리 가는 것은 흘러 보내는 일이다.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가는 시간, 남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도달하기 위해 과부하의 에너지를 쏟아붓는 날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잃어버린 많은 것들은, 다시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빨리 간다고 앞서가는 게 아니다. 우리 삶의 행로와 목적지는 단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느리게 가는 것은 주위의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느리다는 것은 뒤처진다는 것이 아니다. 꾸준하게 오래 멀리 간다는 것이다. 느림을 추구하는 것은 빠름 속에 감춰지고 사라진 많은 것들을 되살아나게 한다. 조금은 느리게 가는 삶, 그 옆에서 느긋하게 지켜봐 주는 든든한 나무 같은 사람이 함께하면 금상첨화다. 모든 명품은 느림의 선물이다.

칼럼니스트  최 생 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강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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