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마로면 수문리 돌쇠마을 돌탑
(15)마로면 수문리 돌쇠마을 돌탑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7.08 10:21
  • 호수 59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초기까지 전설이 올라가는 탑거리 돌탑
원추형으로 잡석을 쌓아올리고 금줄을 친 수문리 돌쇠마을 돌탑의 모습이다.이 돌탑은 신성이 깃든 숭배와 의지의 대상이었다.
원추형으로 잡석을 쌓아올리고 금줄을 친 수문리 돌쇠마을 돌탑의 모습이다.이 돌탑은 신성이 깃든 숭배와 의지의 대상이었다.

돌탑이나 석 장승, 성황당은 옛날부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동네 주민들로부터 신성시 되면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자리를 지켜 왔다. 1970년대 미신타파운동으로 돌탑이나 성황당 등이 대부분 파괴되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시골마을을 지나다 보면 입구에 원추형으로 잡석을 쌓아올리고 금줄을 친 돌탑을 볼 수가 있다. 젊은 사람들은 아마도 동네의 조형물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돌탑은 불교나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민족에게 신성(神性)이 깃든 숭배의 대상이었고, 의지의 대상이었다. 이번 주 우리 동네 문화유산에서는 돌탑을 주제로 하였다.
조탑, 수구막이, 거리 탑으로도 불리는 돌탑은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동네 어귀에 잡석을  원추형으로 정성스럽게 쌓아 올려 신성을 부여하고, 동제사(洞祭祀)를 통하여 마을에 들어오는 액운을 막아내고, 농사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고, 풍수지리설에 의한 동네의 허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토속신앙의 대상물이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고개 마루에 지나가는 행인들이 잡석을 던져 만든 서낭당(성황당)이 행인들의 호환(虎患)을 막아주고 행운을 비는 점에서 돌탑과 구별이 될 수 있다.
보은지명지에 조선시대 초기에 영남의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올라가다가 쌓았다고 기록된 마로면 수문리 돌쇠마을의 탑거리에 있는 돌탑을 찾았다.
수문리는 본래 보은군 왕래면 지역으로 돌로 된 수문이 있어 수문(水門)이라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방하리와 장안면 불목리 일부, 탄부면 구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수문리라 하고 마로면에 편입된 마을이다.
수문1리 인 돌쇠마을은 원앙골에서 흐르는 물이 앞산 정자나무 밑에서 청룡암(靑龍岩)을 휘돌아 흘러 '돌소'라 했는데 변형되어 '돌쇠마을'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까마득히 먼 옛날이야기로 청룡암 부근에는 물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망치로 두드리면 둥 둥 둥 소리가 났다는 청룡암도 몇 년 전 신비함을 풀고자 동네 분이 흔히 쁘레카라 부르는 굴삭기 브레이커로 깨트렸으나 원인도 못 찾고 청룡암 마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탑거리 정자 옆에 마을 유래비와 함께 서 있는 돌탑은 높이 7.7m, 둘레 1.7m로 올해에도 동제를 지낸 듯 금줄이 둘러져 있다. 또 개인 신앙의 대상으로도 신성시 되는지 요즈음 사용한 촛불의 잔해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돌쇠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최종근(70)씨는 이 돌탑의 유래에 대해 "동네에 탑에 대한 기록이 없고,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과 같은 모습이었는데 당시 할아버지들께서도 내력은 모르고 매년 온 동네 주민들이 정월에 정성스럽게 동제를 지내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탑 앞에서 만난 윤순분(86) 어르신은 "이 탑은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대장 신이어요. 세월의 변화로 지금은 동제를 지내기가 어렵지만 매년 음력 정월 3일에 산제 당에서 제를 올리고, 이 탑으로 와서 정성을 다하여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있어요." 라고 설명했다.
세월의 변화로 민속신앙에 대한 믿음이 얕아지고 마을에 젊은이들이 없어 계속해서 동제를 지내기가 어렵지만, 대전의'장동 산디마을 탑제'가 1998년 7월 21일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어 보존·전승되며 주민들의 축제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