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신문리 돌너와집
(12) 신문리 돌너와집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6.17 10:30
  • 호수 59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회인면 신문리의 돌 너와집 문화유산으로 남겨져야

작은 진흙알갱이들이 쌓여 열과 압력으로 변성되어 만들어진 점판암은 일찍부터 두껍게 쪼개어 삼년산성의 성벽을 만들었고, 온돌방의 구들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얇은 판석으로 만들어 거의 반영구적인 수명을 가진 돌 너와집(돌 지붕)을 만들었다.
한때는 돌 너와집이 마을에서 기와집 다음으로 부잣집의 상징일 때도 있었다. 그러던 돌 너와집이 농촌새마을운동과 함께 슬레이트 지붕과 양철지붕으로 바뀌어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번 주 우리 동네 문화유산에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는 돌 너와집을 테마로 하였다. 옛날 우리나라 지붕은 통상 재료에 따라 초가지붕, 기와지붕, 너와지붕, 굴피지붕 등으로 구분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너와지붕'하면 강원도나 경상북도의 나무가 많은 산골 지역에서 도끼나 자귀 등으로 나무를 쪼개어 사방 한자정도의 널빤지 조각을 만들어 얹은 나무 너와집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보은지역과 같이 점판석이 많이 채굴되는 지역에서는 점판암을 얇게 쪼개어 지붕에 얹은 '돌 너와집'을 지었다.
특히 보은에서도 점판석을 많이 채굴하던 내북면 이원리와 회인면 고석리의 인근 마을에는  돌 너와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많은 돌 너와집들이 있었다. 반면 운송수단이 불편하던 시절이라 무거운 돌 너와를 운반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무거운 돌 너와를 지탱하기 위하여 기둥과 서까래가 더욱 튼튼하여야 하므로 건축비가 많이 들어 원거리 마을에서는 시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돌 너와지붕은 시공할 때 초기 비용은 많이 들어가지만 한번 시공하고 나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초가지붕처럼 매년 교체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점이 있었다. 그러던 돌 너와집이 이제는 모두 없어져 점판석의 생산지였던 내북면 이원리와 회인면 고석리에서 조차 찾아 볼 수 없게 되었고, 간간이 돌담장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다행스럽게 보은군 군내에서는 유일하게 신문리에 아래채 2동이 돌 너와집으로 남아 있어 회인면 신문길 181번지를 찾았다.  
회인면 신문리는 400년 전 문즉공 고대익 선생이 낙향하여 자리 잡은 새문리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평촌리를 합하여 신문리로 바뀐 마을로  산수가 좋아 2012년 건립한 마을 유래비에 기록된 인재만 하여도 박사 7명에 교장선생님, 고위공무원, 고위 군 장교 등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70년 전에 신문리로 시집와서 살고 있다는 조복순(88) 어르신은 "지금은 신문리가 작은 마을이지만 전에는 80호가 넘는 큰 마을로 그중에 절반이 돌집이었지요. 지금은 다 없어지고 두 집의 아래채만 남아 있는데, 모두 내가 시집 왔을 때 이전부터 있던 돌 지붕이지요." 하신다.
신문길 181번지 고왕준씨 댁 아래채는 지금은 비록 창고로 사용되고 있으나 방 두개에 부엌까지 남아 있으며, 사각기둥에 튼튼한 서까래를 걸고, 그 위에 나무 가지와 수수깡을 엮어 깔고 그 위에 진흙에다 여물을 썰어 반죽한 흙을 골고루 깔고 돌 너와를 올렸는데 70년 이상을 버티고도 아직 정정하다.
하늘색 양철지붕을 얹은 안채 역시 돌 지붕이었다가 농촌새마을사업과 함께 양철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이 된다. 비록 아래채지만 이 소중한 돌 너와집도 이제는 운명을 알 수 없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돌 너와집을 잘 보존하여 후대에 민속 문화자료로 남겨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서성범(보은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회인면 신문리의 돌너와집. 점판암을 얇게 쪼개어 지붕에 얹는 방식의 지붕이다.
회인면 신문리의 돌너와집. 점판암을 얇게 쪼개어 지붕에 얹는 방식의 지붕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