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5.12 21:35
  • 호수 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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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 만 동
조자용민문화연구회 대표, 도화리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독일의 작가 '안톤 슈낙'의 수필 제목이다. 수십 년 전 읽었던 그 수필의 제목과 내용을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사춘기 시절,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존재라고 착각하며 슬픈 감정이입을 심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문에서 '슈낙'은 한 편의 시와도 같이 세밀한 섬세한 언어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묘사한다. '슈낙'에게 서정적인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은 다양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가 그를 슬프게 한다. 가을철,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사슴의 눈망울, 우리 안에 갇힌 동물원의 표범,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친구 클라라의 묘비명, 낭만주의 시인들의 가곡, 또는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이 그를 슬프게 한다. 
불 밝힌 열차의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시계소리가 들릴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그런 순간들에 그는 슬픔을 느꼈다.
슈낙의 슬픈 감정의 대상과 순간들은 극히 주관적이다. 하지만 그의 산문의 단어들과 문장들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 넘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은 인간이 슬픔을 느끼는 대상이나 순간들은 거의 비슷하고 슬픔에 대한 서로의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봄이다! 나에게 4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봄이라고 말한다. 춥고 우울한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온 천지에 새 생명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봄! 동백나무꽃과 수선화를 시작으로 개나리, 민들레, 진달래, 목련, 명자꽃 등등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난다. 숲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눈부신 애기연두색으로 물들여진다. 나는 찬란하고 희망이 넘쳐나는 이 봄을 사랑한다. 
그런데 이 찬란하고 희망찬 봄날에 느닷없이 가을에나 어울릴 듯한 슈낙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수필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얼까?  
4월이 되고 5월이 되면 자연은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희망을 안겨주지만, 마음 한 편에서는 아지 못할 슬픈 감정들이 젖어들어 오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 읽은 '슈낙'의 산문 속 단어들과 문장들이 아직도 기억의 상자 안에 잠재해 있듯이 우리 역사 속에서 벌어진 아픈 기억들이 내 머리 속에 잠재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이 상징하는 늙음과 죽음이인간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과정과 결과임에도 그것은 언제나 슬픈 감정을 유발하게 된다, 더욱이 그 죽음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지 못하고 우리들의 잘못이나 탐욕의 결과로서 애틋하거나 억울하게 일어날 때 그 슬픈 감정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역사에서 봄은 그런 아프고 슬픈 일들이 유난히 많은 계절이었다. 4.3제주, 4.19혁명, 4,16세월호, 5,16쿠테타, 5.18광주항쟁 등등 숫자로 기억되는 가슴 아픈 사건들 속에서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혹은 남들을 위해 싸우다 사라진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마음 저 한쪽 구석으로 슬픔의 감정들이 저며 들어오는 것이다.
온갖 곱고 화려한 꽃들이 만발하고 산과 들이 온통 푸르름으로 물들어 희망과 사랑을 노래해야할 찬란한 이 봄에 약간은 어둡고 슬픈 문구들을 떠올리는 것은, 우리들을 위해 혹은 우리들의 잘못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진실을 밝혀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도 우리들 삶의 새로운 희망과 사랑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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