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옛길 불목이로 들어가다
①옛길 불목이로 들어가다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1.07.28 10:42
  • 호수 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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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사무소~에밀레박물관~상판저수지 입구 삼거리 오른쪽~아랫불목이~윗 불목이 고갯마루~삼가리 산제당~삼거리 4.1㎞
▲ 불목이 옛길은 소로가 아닌 신작로였다. 숲속 아무도 다닐 것같지 않은 그곳에도 길은 나 있었다.

장마가 끝났데도 요즘은 종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비가 온다. 며칠 계속 내리는데도 기상청은 그 비를 소나기라고 한다. 소나기는 한 낮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다가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후두둑’ 하고 쏟아지던 그 비가 아닌가?

지난 24일 불목이 길을 걸었다. 그 날도 비가 오락가락 하고 전날에도 비가왔던 지라 한 달 가량 신문을 통해 공지를 했는데도 참가자는 숲해설가로 활동하는 정은주(보은군 민원과)씨와 보은읍 장신리 보은교육지원청 맞은 편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광미씨 뿐이었다. 비 때문이려니 스스로 위안을 하며 불목이 옛길을 찾았다.

원래 계획했던 걷기코스 불목이 옛길은 삼가1, 2리와 만수리, 구병리 주민들이 속리산을 오갈 때 이용했던 길이다. 속리산사무소 옆을 지나 삼가리로 향하는 지방도까지 전체 4.1㎞를 걸을 계획이었으나 불목이 상당부분을 개인이 소유하면서 출입을 통제하는 바람에 불목이 고개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편도 약 1㎞, 왕복 2㎞를 걷는데 만족해야 했다.

국립공원구역에서 사유지가 제외된 지난해 불목이 안의 사유농지는 경계측량을 해서 경지로 만들어 놓았는데 아직 아무런 작물도 심지 않은 곳도 있었고 일부는 들깨를 심은 곳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불목이 경지 소유주는 1만여평 정도 되는 큰 규모의 밭에 메밀을 심었다고 했다. 윗불목이 정상에서는 구병산도 보이고 경관이 수려하다며 나중에 메밀꽃이 피면 구경을 오라고 했다. 산 정상에서 보는 메밀꽃이라, 와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메밀꽃 장관이 벌써 눈앞에 그림처럼 다가온다.

 

패이고 끊어지고 길이 우습지도 않았을텐데 땅 소유주는 몇날 며칠 장비를 들여 옛길을 신작로로 닦아놓았다. 우리가 찾았을 때는 비가 온 뒤이고 이제 막 흙길 조성이 끝난 뒤라 질척해 걷기에 불편했지만 앞으로 트랙터 등 장비들이 많이 다니고 사람의 발을 타면 흙이 다져져 제법 걸을 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갈 데 없고 먹고살기 어려운 화전민들의 터,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불목이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불과 왕복 2㎞ 남짓한 길을 걷는 내내 자생하는 야생화와 초목들을 관찰하는 숲 속 생태공부를 했다. 주변을 돌아볼 시간도 없이 쫓기듯 앞사람 발 뒤꿈치만 쳐다보며 발걸음을 산행이 아니라 곤드레나물이라 불리는 고려엉겅퀴, 구릿대, 천남성, 포카리스웨트 향이 나는 비목, 하늘말나리, 활량나물, 어수리, 쥐다래, 소 풀 뜯기며 따 먹었던 개암나무 열매 일명 깨금, 산딸기,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다래도 봤다. 나비도 보고 때 이르게 나온 메뚜기도 발견하고 꿀 따느라 여념이 없는 벌도 보면서 느리게, 아주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속보가 아닌데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불목이(佛目里)는 화전민의 삶터
행정구역상 삼가리로, 부처님 눈의 모양이라는 불목이의 옛길은 속리산사무소 옆 소로에서 시작된다. 고 조자용 박사의 영혼이 숨 쉬는 에밀레 박물관을 지나니 경작지가 나왔다. 표고버섯장도 있었고 최근 감자를 캔 밭, 옥수수가 잔뜩 들어앉은 밭도 있었다. 짐승들의 피해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옥수수 밭 둘레에는 망을 쳐놓기도 했다. 그 망이 옥수수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순진한 고령의 어르신 농민들은 그 망이 버텨주길 기대하는 것 같다.

 

밭고랑 길이가 불과 7, 80미터 남짓한데 4고랑에 감자를 심은 김대진(78, 속리산 상판) 할아버지가 부인인 문기봉(77) 할머니와 함께 때늦은 감자를 캐고 계셨다. 한창 여물어야 할 때 가물어서 감자가 잘다고 말씀하신다. “할머니 혹시 옛날에 저 불목이에서 사셨어요?" 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신다.

“강원도 정선에서 살다가 먹을 것을 찾아 부산으로 갔다가 이곳 불목이로 왔는데 그 때는 한 13집이 살았어. 아무것도 없이 와서 산을 일궈 곡식을 심거 먹었어. 지금 이 밭도 우리게 아니고 하천부지여." 하신다.

문씨 할머니는 불목이에 사는 사람들은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피난지였던 셈이다.

지난 26일 보은향토문화연구회(회장 김홍춘) 월례모임에 참석했다가 불목이에 대한 귀동냥을 할 수 있었다.

김건식 문화원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국가시책으로 산림녹화사업을 하면서 대대적으로 화전민을 정리했는데 1972년과 73년 보은군 산림과에 화전정리계 차석으로 근무했을 때 속리산면 불목이 화전정리를 담당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당시 타 지역으로 이주하면 가구당 40만원(지금의 4, 5천만원 규모), 면 중심마을로 하산하면 가구당 20만원의 이전비를 줘서 산 밖으로 이주시키고 화전에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카시 나무, 은사시나무, 오리목 등 빨리 크고 화목으로 쓸 수 있는 나무를 심었다고 했다.

김건식 문화원장은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속성수를 심을게 아니라 수종을 가려서 나무를 심었으면 지금쯤 우량 재목이 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화전민들이 살던 집은 초가집도 있었지만 귀틀집, 너와집이 많았다며 그걸 뜯어내지 않고 지금까지 그대로 뒀으면 재산적 가치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등 엄청난 가치가 있었을텐데 참 아쉽다고 덧붙였다.

군내 화전민이 가장 많았던 속리산면의 화전정리 업무를 담당했던 곽동수 전 수한면장은 제 21회 충북향토문화학술발표회 화전민의 발자취 보은 편에서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는 화전민들은 면사무소 책상을 들어 엎어 버리겠다고 할 정도로 반발이 심했고 먹고 살기 막막한 일부 화전민은 나무를 뽑아내고 다시 농작물을 심기도 했는데 얼마 후 수확할 수 있는 것을 낫으로 쳐내고 농작물을 심은 농민을 처벌해야 하는 일은 너무 힘겨웠다’고 회고하고 있다.
본적도 없고 이번에 들었지만 화전민 불목이 주민들의 삶이 느껴졌다.

 

 

#삼가권 학생에게 공포의 길
불목이 길은 삼가권역 학생들이 중학 과정인 속리고등공민학교를 다니고 주민들이 상판장(지금 묵 공장이 있는 자리)에 물건을 사고, 팔고, 법주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고 속리산으로 놀러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외부와 닿는 소통의 통로였다.

 

하지만 그 은 공포의 길이었다. 아랫 불목이 사명당골에서 나온 호랑이가 웃불목이고개를 넘어 삼가리 산제당까지 따라온다는 얘기가 있어 밝은 대낮에도 이곳을 지날 때는 등골이 오싹하고 머리가 주뼛 서고 식은땀이 났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길이 아닌 소로의 갈목재 길도 있었지만 그길로 가면 불목이 길로 갈 때보타 4㎞ 정도를 더 돌아가야 하고 무섭기는 매한가지여서 삼가권역 주민들은 그래도 길이가 짧은 불목이 길을 택했다.

이종성(67) 삼가1리 이장은 속리중학교 전신인 속리고등공민학교가 속리산사무소자리에 있었는데 삼가1, 2리와 만수리, 구병리까지 4개동에서 전체 15명~18명, 이종성 이장과 같은 학년은 삼가1리 3명, 2리 2명, 구병리 1명 총 6명이 불목이 옛길로 속리고등공민학교를 다녔는데 4㎞를 걸어 다녔다고 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면 8시경에 닿는데 거의 뛰다시피 해서 운동화가 한 달에 한 켤레가 모자랄 정도였다. 매일 뛰어다니니 항상 배가 고파 2교시 후에는 어김없이 점심 도시락을 먹어 점심부터 집에 갈 때까지 요기할게 없어 물로 배를 채우곤 했다.

 

물로 배를 채운 학생들은 시간 되는 대로 각자 학교와 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모여서 한꺼번에 학교를 오갔다. 불목이 안 사명당골에서 호랑이가 나온다고 했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깜깜해지기 전에 집에 가려고 용을 썼다. 삼가권역 학생 중에 주번이 있으면 나머지 학생들이 모두 그 학생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집으로 갔다. 귀가가 늦어 밤에 오갈 수도 있는 경우를 대비해 솜을 뭉친 막대기와 석유를 담은 깡통을 가지고 다니며 횃불로 길을 밝혀 불목이 길을 오갔다.

 

자식들이 늦게까지 오지 않으면 걱정이 된 부모들은 불목이 고갯마루까지 마중 나와 자식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호랑이가 나온다는 사명달골엔 최근까지도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의 장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내색은 안했지만 그 곳을 지날 때는 웬지 등골이 오싹하고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곳에 호랑이가 살았을까?

1969년 경 최봉한 군수는 이같은 삼가권역 주민들 왕래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소로였던 갈목재를 트럭이 차가 다닐 수 있게 신작로를 만들었다. 이후 주민들은 6.25전쟁 후 미군이 쓰다가 버린 지에무씨(GMC)와 같은 '쓰리쿠타(?)’ 트럭을 이용해 속리산을 오갈 수 있었다. 주민들은  최봉한 군수에 대한 고마움으로 공적비를 세웠는데 지금 삼가1리 들어오기 전에 있는 다리 근처에서 최봉한 군수의 공적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1975년 상판장터는 화전민들의 이전으로 거주지가 되면서 상판장이 없어지고 불목이 옛길은 화전민 터가 정리되면서 삼가권역 주민들의 이용이 점차 줄었고 이제 그 옛길을 걷는 이들은 없다.

하지만 불목이 옛길은 없어진 것이 아니다. 다만 이용하지 않을 뿐이다. 이번 보은사람들이 주관한 태마기행으로 그 길을 찾은 것 처럼 해마다 버섯을 따는 사람들이 옛사람들이 내놓은 길을 아주 요긴하게 이용하고 있고 한남금북정맥 종주자들의 발길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불목이 옛길을 끝까지 종주하지 못했지만 화전민들의 삶, 한 시대 역사의 현장을 다시 꿰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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