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내북 법주리 한정숙 할머니의 뒷간
(4)내북 법주리 한정숙 할머니의 뒷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4.22 11:17
  • 호수 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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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밤이면 뒷간귀신 이야기에 발만 동동
한정숙 할머니의 뒷간의 모습. 옛날 뒷간의 모습이 아직도 그래도 남아있다.

요즈음 사람들에게 옛날의 뒷간이라는 단어를 주면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생각할까?
아마도 많은 사람이 코를 막아야 하는 냄새, 불결함, 기어 다니는 파리의 애벌레인 구더기 등을 떠 올리고는 얼굴을 찌푸리겠지만, 뒷간은 우리에게 먹는 것만큼이나 귀중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일 때도 있었다. 사라지는 우리 동네 문화유산, 네 번째는 요즘 화장실, 변소, 칙간, WC, 중국 관광객이 오면서 세수간(洗手間), 사찰은 근심을 덜어낸다고 해우소(解憂所)라고도 불리지만, 정감 있고 추억이 깃든 '뒷간'을 테마로 잡고 소문을 따라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를 찾았다.
근동에서는 그래도 부잣집으로 불리었을 것으로 보이는 한정숙(82) 님의 집 대문 터 곁에 약 120년의 역사를 가진 뒷간이 아직도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 깔끔하고 기품 있는 주인을 닮은 듯 정갈한 뒷간은 판자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옛날의 냄새로 객을 맞아 주었다. 땅을 파서 내용물을 담아내는 큰 항아리를 묻고, 판자로 쪼그리고 앉을 발판을 놓은 전형적인 우리의 뒷간이다.
한정숙 님에 따르면 약 60년 전 시집왔을 때도 지금과 똑같았으며, 약 120년 전 씨 증조부님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지을 때 같이 만든 뒷간이라고 한다. 내용물을 푸는 바가지와 지게에 지고 운반하던 질그릇으로 만든 장군은 보이지 않았으나, 바닥에 놓인 플라스틱 휴지통과 벽에 매달려 있는 하얀 두루마리 화장지는 지금도 주인이 텃밭에서 일하다가 용변이 마려우면 흙 묻은 발을 씻고 집 안에 있는 화장실 가기 불편할 때 사용하고, 동네 분들도 지나가다가 용변이 마려우면 사용한다는 말의 증표로 보인다. 60년간을 주인의 근심을 풀어주고, 집안의 안녕을 빌고, 추억이 겹겹이 쌓인 뒷간은 아직도 주인의 사랑을 받는 생활의 필수품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배설물은 비록 냄새는 나지만, 1778년 박제가라는 분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쓴 '북학의제'에서 '청나라 사람들은 분뇨를 금처럼 아끼고 재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농사에 사용하여 많은 수확을 하고 있다'라는 기록에 따라 당시 길거리에 가득하던 분뇨가 뒷간으로 모아져 비료로 사용되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원으로 대접을 받았다. 또한 똥 장수까지 등장하게 만든 뒷간은 풍부한 비료창고로 먹고 배설하고 다시 농작물을 통해 먹는 생태순환적인 고마운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뒷간이 6.25 전쟁 때 미군을 따라 들어와 안방을 차지하고, 용변은 물론 세수와 목욕까지 시켜 주면서 주인의 마음을 빼앗은 수세식 화장실에 밀려 버림받은 처량한 신세가 되더니 이제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찾기 힘든 희귀한 생활 문화유산이 되었다.
"처가와 뒷간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좋다"는 옛날 속담처럼 뒷간은 냄새 때문인지 풍수지리 문제인지 대부분 안방에서 멀리 떨어진 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동지 때 집안의 잡귀를 쫓아내는 동지팥죽이 비손하고 나면 가장 먼저 향하던 곳은 뒷간이었다. 뒷간에는 불과 60년 전만 하여도 화장지가 없던 시절이라 신문지, 비료 포대, 짚단이 앉아서 손닿는 곳에 버티고 있었고, 벽에는 언제나 죽음의 귀신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뒷간으로 향한 빛바랜 누런 봉투의 부고장(죽음을 알리는 통지문)이 꽂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의 뒷간귀신 이야기가 무서워 밤에 대변이 마려우면 발을 동동 구르며 형과 누나를 붙들고 애원을 하고, 밤에 뒷간에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닭장의 닭들에게 절도 하였다. 또한, 비료가 부족하던 시절 뒷간에 쌓이는 내용물은 농사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비료라고 생각되어 밖에 나갔다가도 힘들게 대변을 참고 집으로 돌아와 거름을 보태었고, 뒷간의 내용물을 퍼서 논, 밭에 뿌리고 나면 물만 남아 큰 덩어리를 내리면 “풍덩" 하면서 물이 튀어 올라 엉덩이를 적시던 추억도 있는 뒷간이다.
이런 많은 추억과 함께 생활의 필수품 역할을 했던 뒷간이 이제는 수세식 화장실에서 화장까지 하는 사람들에게 '뒷간'이라는 이름조차 낯설고 설명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 뒷간이라도 오랫동안 깨끗한 동네 공중화장실로 남아 옛날의 뒷간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서성범(보은군향토문화연구회)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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