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야는 벌써 가을을 준비하고 있더이다
산야는 벌써 가을을 준비하고 있더이다
  • 송진선
  • 승인 2009.09.17 10:16
  • 호수 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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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암~북가치~관음봉~문장대~신선대~천왕봉~소천왕봉~대목리

자고나니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잠시 한 눈 팔거나 일상에 몰두하다보면 언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찾아왔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이렇듯 계절은 항상 소리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가 끝나곤 한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돌면 산중엔 발길이 바빠진다.

8월 말까지만 해도 좀처럼 익을 것 같지 않던 오미자, 으름, 다래, 머루 등 산열매들이 하룻밤사이에 익어버린다. 잘 익어 껍질이 벌어진 으름, 검게 익은 머루, 말랑말랑하게 익은 다래. 가을 산이 주는 풍요를 눈에 그리며 산행을 한다. 가을 산은 한없이 많은 산열매를 내어주기에 사람들은 산열매의 맛을 만끽하며 어둑어둑한 산행을 마감할 수 있다.

지난 13일 속리산악회(회장 최윤태)에서 주관한 우리지역 명산 탐방 중 속리산 환(還)종주 두 번째 구간 등산에 참여했다. 토실토실하게 여문 도토리들이 융단처럼 깔려있는 등산로를 따라 땅위에 불쑥 솟아올라 있는 두툼한 몸의 싸리버섯과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루궁둥이 버섯까지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김연진씨는 싸리버섯을, 이명화씨는 노루궁둥이 버섯을 땄다.)

내노라하는 산 꾼들 일행에 끼어 산을 좀 탄다고 자만을 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많은 고생을 했다. 그 바람에 산 행기를 쓰는 지금도 허벅지 앞쪽과 종아리(일명 장딴지)는 알이 통통 배어 걸음걸이가 시원찮다. 산행 후유증을 남긴 9월13일 속리산면 사내리 여적암 입구에서 북가치를 거쳐 관음봉과 문장대를 올라 천왕봉까지 내달려 소천왕봉을 거쳐 속리산면 도화리 대목골로 하산하는 14㎞, 장장 11시간의 산행기이다.

 

▲ 관음봉을 배경으로 산꾼들이 카메라 앞에 섰다.사진왼쪽부터 속리산악회 김기식 부대장이며·송기호·김재열·김동율·김연진·이명화씨와 함께 산악회 총무 김진덕, 최윤태 회장이다.

 

#일제의 악랄한 만행, 소나무까지
등산 시작지점인 여적암을 거쳐 북가치로 가는 등산 구간에는 하늘로 쭉쭉 벋은 아름드리 우리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깨끗한 산공기는 간밤에 내린 비로 더 깨끗하게 씻겨 청아하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 수 정도로 쾌적하다. 가슴속 깊숙이 내려앉은 세파에 찌든 찌꺼기는 모두 토해내고 대신 자연이 주는 청아한 산 공기를 정말 원 없이 들이마셨다.

그냥 숲에 몸을 맡겨 버리니 걱정거리들로 가득 했던 머릿속까지 어느새 텅 비었다. 기분 좋게 발걸음을 위로위로 옮겼다.

그런데 아뿔싸! 소나무 마다 생채기가 나있다. 이게 바로 송진을 채취해간 현장이구나 하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소나무 밑동을 칼로 베어내 겉껍질을 벗겨내고 그렇게 해서 드러난 속살에 줄맞춰 상처를 냈다.  속살에 낸 상처에서 묻어나오는 송진을 채취한 것이다. 내 몸에 생채기를 낸 것 같이 쓰려온다.

북가치 정상으로 올라오는 내내 오래된 소나무는 성한 것 하나 없이 모두 상처투성이다. 일제강점기의 무게가 짓누른다. 약소국의 비애 그 자체였다.

산행을 리드한 최윤태 회장에 따르면 여적암에서 북가치까지 등산로는 구루마가 다니던 통행로였다고 했다.

지명지에서 확인한 결과 우리가 흔히 부르는 북가치는 보은군에서 상주시 화북면으로 통하는 큰 고개로 북쪽으로 가는 고개라 해서 북가재, 북가추리라고 한다.

아마 현재와같이 산외면 대원리를 거쳐 경북 상주시 화북면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보은군에서 화북으로 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던 셈이다.

북가재나 북가추리는 지금 북가치라 부르는데 고개를 뜻하는 재 대신 한자의 고개 치(峙)를 써서 북가치라 부르는 것이다.

여적암에서 북가치까지는 비교적 등산이 편하고 등산로 또한 잘 조성돼 있다.
송진 채취 현장도 있으니, 속리산에서의 특별한 체험거리가 없어 법주사 탐방 외에 수련원 시설 이용에 그치고 있는 속리산 수학여행객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는 체험장소로 활용하면 의미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

  

 

#더이상 등산 금지구간 아니다
북가치를 지나 관음봉, 문장대까지는 사실상 사람들이 등산을 할 수 없는 금지구간이다. 또 천왕봉에서 소천왕봉, 대목 골까지도 등산 금지구간이다.

그래도 여적암에서 올라가는 사람 외에도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 절골에서 올라오는 사람, 중벌리에서 올라오는 사람 등 곳곳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 의해 이미 이 구간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등산로를 조성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길이 잘 나있으며 암벽구간에는 밧줄까지 내려놓았을 정도다.

종전에는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이 길목 요소요소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을 적발하는 등 철저히 관리했다.

이 구간을 등산하다 적발되면 50만원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 일찍 금지 구간을 통과하는 등 나름대로 금지구간을 등산하는 방법을 터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공원입장료가 폐지된 후 공개적으로 등산로라고 표방하지는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등산을 허용하는 구간이 됐다. 속리산 알프스 구간을 종주하는데도 지장이 없다.

이제는 규제 구간의 등산이 허용되기 때문에 이 구간의 위험지역을 파악해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안전하게 등산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슬아슬한 바위타기와 내리기를 하면서 관음봉 정상에 올랐다. 관음봉은 문장대와 마찬가표로 큰 바위 덩어리다. 어떤 산악회에서 관음봉 정상에 검은 돌로 관음봉이라고 새겨놓은  표지석이 참 볼썽사납다.

최윤태 회장은 언젠가도 관음봉 정상에 표지석이 있는 것을 일부러 부숴버렸는데 또 세워놓았다며 당장이라도 부술 태세다. 문장대와 마찬가지로 정상이 아닌 관음봉우리 바로 아래에 표지석을 설치하면 될 것 같다.

관음봉에서 바라본 문장대가 절경이다. 바로 아래로는 푸르렀던 나뭇잎 위에 단풍이 채색되고 있다. 가을이 물들고 있는 속리산 문장대 위는 낮 12시가 되기 전 이미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속리산 기암괴석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백두대간의 힘찬 줄기가 장쾌하다.

운장대라고도 하는 문장대는 적어도 세 번은 와야 극락세상에 간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이다. 참 그러고 보니 문장대 휴게소가 사라졌다.

문장대 아래를 버티고 있는 노후된 휴게소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해친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언젠가는 대형 안테나도 철거돼 그야말로 거칠 없이 암봉으로 이뤄진 문장대를 조망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금이 저린 암벽타기의 극치
문장대에서 천왕봉까지는 잘 나있는 등산로 덕분에 별 문제 없이 닿았지만 천왕봉을 지나 소천왕봉을 거쳐 대목 골로 내려오는 하산길이 앞을 가로막는다.

벌써 해는 머리를 숙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거쳐야 하는 길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원 없이 암벽을 탄 날이다. 그런데 이구간의 암벽은 단단한 돌이 아니라 조각조각 부서진다. 발을 어디다 둬야 할 지 그리고 한 발 내디딘 다음 손은 또 어디에다 놓아야할 지…. 머릿속이 하얘진다.

겨우 바위를 타고 오르니 이젠 깎아지른 절벽 위다. 그 절벽 위를 지나야만 다음으로 나갈 수가 있다. 고난의 연속이다.

오금이 저려 옴을 느끼고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지만 위험할수록 본능적으로 몸을 바위에 밀착시키기 때문일까 일행 모두 그런대로 암벽을 잘 탄다.

칼날 같은 절벽위에서 자리를 확보하고 주변을 바라보니 절경이다.
깎아지른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바위벼랑 사이로 노송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가 하면 바위 능선을 싸고 있는 숲은 기암괴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별세계'를 연출한다. 속리산의 또 다른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는 구간이다.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산한 시간은 이미 해도 자취를 감춰 어둠이 몰려든 저녁 7시다. 아침 8시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속리산 환종주 두 번째 구간에서 11시간을 보냈다.

속리산. 우리가 아는 문장대, 천왕봉, 늘 가는 등산로가 아닌 제3의 등산로를 개척해 속리산의 속살도 보고 속리산의 생김새 그 위용을 다시 한 번 느낀 시간이다.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기쁨도 크지만 머릿속에는 벌써 다음 구간을 오를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 관음봉을 향해 걷고 있다.아침 날씨가 제법 쌀쌀했는데도 구슬땀을 줄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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