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결고운 글] 은비
[칼럼 결고운 글] 은비
  • 보은사람들
  • 승인 2021.03.25 11:25
  • 호수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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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는 18년째 내가 키우고 있는 반려견이다. 18년 전 3월 어느 날, 아주 작은 시츄아가를 말도 없이 남편이 데리고 왔다. 어릴 적부터 개를 키워본 경험이 없던 나는 느닷없는 남편의 행동에 화가 났다. 막 화를 내면서 저런 애를 왜 데려왔냐고.

그런데 요녀석 작은 상자에 넣어주었더니 낑낑 거리지도 않고 잘도 잔다. 작은 몸짓으로 거실을 요리조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며칠이 지나도 짓지도 낑낑거리지도 않아서 벙어리인가보다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짓을 줄도 알았다. 처음 데리고 올 때 눈이 짝짝이라 반값에 데려왔다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자 그런 장애쯤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예뻐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커서 떠난 빈자리를 은비는 우리 집 막내인양 그렇게 메워주고도 남았다. 순하고 착한 은비는 자라면서 나를 닮아갔다. 여간해선 짓지를 않고(말이 없는 나를 닮아서) 내가 책을 보고 있으면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옆에 앉아 있곤 했다. 절대 놀아달라고 보채지도 않았다.

아침 일찍 은비와 함께하는 산책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혼자 산책하려면 맹숭맹숭할 텐데 은비와 함께하면 오롯이 자연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함께 풀내음도 맡아보고, 어제는 없던 풀꽃이 예쁘게 피어난 것도 보고, 둑방길에서 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함께 들었다.

어쩌면 동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부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은비는 내게 동물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은비는 내게 작은 풀꽃 앞에 낮게 앉아서 마주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사람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말없이 그렇게 은비는 나와 함께 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은비는 이제 많이 늙었다. 사람으로 치면 100세 가까운 나이라고 한다. 함께 산책은커녕 집에서도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지기 일쑤다. 퇴근하면 달려 나와 꼬리를 흔들던 은비는 이제 귀가 들리지 않아 쿨쿨 잠만 잔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여기저기 냄새를 맡으며 다닌다. 아마 냄새로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나보다. 그래서 물그릇도 오줌 누는 곳도 옮기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물을 먹으러 가고, 기억을 더듬어 오줌을 누러 간다. 내가 퇴근하면 내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는다. 내 얼굴을 못 보니 냄새로 나를 알아보는 방법이리라.

4년 전 자궁축농증 수술을 받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고, 그때부터 심장약을 아침저녁으로 먹이고 있다. 요즘은 신장이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자주 다니고 있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위태위태하게 은비는 삶을 견디고 있다. 어떻게 은비와 이별을 할지 걱정이다. 다만 사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은비를 돌볼 것이다.

나와 함께한 18년, 은비는 내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고 깨우쳐 주었다. 은비가 없었다면, 고양이를 무서워하던 내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서 고양이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다친 고양이를 정성껏 돌보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리고 따스한 눈빛으로 고양이에 대한 동시를 쓸 수 있었을까?
풀꽃들의 작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칼럼니스트 김 철 순(시인, 관기약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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