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공예 명장 반열에 오른 서 재 원 어르신
짚공예 명장 반열에 오른 서 재 원 어르신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1.07.21 10:40
  • 호수 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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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된다며 안주하지 않고 도전해 얻은 성과

옛날 초가였던 우리집 광의 모습은 이랬다. 독(항아리)이 몇 개 있었다. 그 안에는 쌀도 있었고 보리쌀도 있었고 콩도 있었다. 겨울에는 고염과 홍시를 항아리 안에 넣어두고 겨우내 간식으로 먹었다. 항아리 뚜껑은 볏짚으로 둥글게 엮은 것으로 기억된다.

▲ 자신의 작품을 진열해 놓은 전시장 앞에서 부인 황선희씨와 함께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재원 어르신.

 

선반, 우리는 시렁이라 했다. 그 시렁위에는 두레판도 있었고 소반도 있었고 봉새기도 있었고 맷방석도 큰 것과 중간 것, 작은 것 등 크기별로 있었다. 벽에는 햇볕에 잘 말리면 약간 노란빛이 노는 박 바가지가 있었고 싸리나무로 엮은 종두래미도 걸려있었다. 그리고 두지에는 나락이 들어있는 짚 가마니가 쌓여 있었다. 그 때 두지는 쥐의 천국이었다. 볏짚 가마니에 구멍을 내 나락을 까먹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던 것. 아버지는 겨우내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엮고 맷방석을 만들고 삼태기를 짰다.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70년대까지도 볏짚은 실생활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아주 요긴한 재료였다. 하지만 산업화로 볏짚으로 만든 용기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생활용구들이 차지하고 있다.

산외면 신정리에는 이미 유행이 지나 거의 자취를 감춘 볏짚으로 만든 생활도구들을 공예품으로 승화시킨 대가가 있다. 바로 서재원 어르신이다. 현재 내북 짚공예 마을기업의 대표이기도 한 서재원 어르신은 85세의 고령에도 아이디어가 매우 독창적인데다 여러 번 거듭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내는 장인정신이 대단하다.

지난 15일에는 청주에서 열린 전국 관광기념품 공모전 지역예선전에 짚으로 만든 쌀 항아리를 출품해 장려상을 수상했다. 금속, 철제, 도자기, 목공예 등이 대세를 이루는데서 유일하게 짚공예로 수상을 한 것이어서 주최 측이 매우 경이롭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충북 공예조합에서는 2011 제14회 전국관광기념품 공모전에 어르신의 작품을 충북도 대표작품으로 추천해 출품했다. 한달 후 쯤 결과가 나오는데 그의 제자들은 물론 도 공예조합에서도 어르신 작품 수상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묘암 서재원 어르신은 7월23일 오후 6시30분에는 지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답례로 짚공예 장려상 축하연 및 전시회를 이평리 청주본가(☎543-1233) 3층에서 연다.

 

▲ 둥구미를 엮고 있는 모습이다.

 

#짚신 때문에 짚공예에 엮여
고무신이 나오기 전 짚신은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신는 운동화나 구두나, 샌들이었다. 몸이 꽁꽁 언 겨울이나 비가 한 달 이상 계속되는 장마에도 평민의 신발은 짚신이었다. 서재원 어르신이 짚공예를 시작하게 된 동기도 바로 이 짚신에서 비롯됐다. 자신의 동생이 동네 이장을 볼 때 산외면 청년회가 주관한 면 화합잔치의 1시간 안에 짚신 삼기 대회에 신정리 대표선수로 나가게 된 것이다. 1주일 정도 매일 시계를 보며 짚신 삼는 연습을 해서 결국 1등을 차지했다. 그 때 만든 짚신은 지금 신주단지 처럼 모시고 있다.

대회가 끝나고 자신이 만든 작품이 어딘지 모르게 성글고 잘 엮여지지 않았다고 여긴 어르신은 그 때부터 시간 날 때, 심심할 때마다 짚신삼기 삼매경에 들어갔다. 재료도 다양해졌다. 거친 짚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을 짚을 잘 다듬고 마디를 끊어 속에 있는 부드러운 것만 취해 삼거나, 왕골을 접목하거나, 중간에 닥나무 껍질로 무늬를 넣기도 했다. 또 크기도 성인 남자의 것을 삼기도 했고 청소년용, 어린이용 등 자유자재로 솜씨를 보였다.  짚신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어르신은 옛날 짚으로 만들었던 생활도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짚신, 삼태기는 물론 새집도 만들고, 종두리(방언, 표준어는 둥우리)도 만들고 둥구미도 만들고, 맷방석도 만들고 응접테이블보 까지도 만들었다. 어르신은 옛것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접목했다. 바로 홑겹이 아니고 두 겹으로 엮었고 밑둥에는 받침대까지도 엮었다. 중간에 닥나무로 무늬를 넣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섬세하기는 어디 비할 데가 없다. 실도 아니고 엉클은 짚인데 자투리 하나 보이지 않고 작품 어디를 살펴봐도 시작과 끝맺음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잘 만들어진 소품은 앙증맞아 탐이 날 정도다. 어르신 자신 전시장에는 지금 어디 내놓아도 괜찮겠다 싶은 것만 골라 진열해놓았는데 종류만도 2, 30개, 개수로는 100여점에 달한다.
눈이 침침해지고, 엄지손가락이 돌아가고 손바닥이 갈라지고, 논이 어둡고, 손톱이 부서지면서까지 새끼를 엮고 매듭에 영혼을 불어넣은 작품들이다.

 

▲ 짚신

 

#드디어 장안으로 서다
이같이 짚공예 분야 문화재급, 명장 반열에 오를 충분한 실력을 보이고 있는 서재원 어르신의 짚공예가 단순한 취미생활로 묻힐 수도 있었다. 그런 어르신이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은 그동안 어르신에게 짚공예를 배운 수제자 최문자(47, 내북 봉황, 삼베 제작)씨 때문이다.
이번 충북도관광협회와 충북공예협동조합이 주최한 충북 관광공예품 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한 것도 최문자씨로 인해서다. 어르신은 이 나이에 무슨 하다가 입선조차 하지 못해 제자들 앞에 면이 서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밤 12시 이전에는 잠을 자지 않았다. 그동안 삼태기, 짚신, 멍석, 새둥지, 둥구미는 물론 항아리, 소반, 교자상, 솥단지, 화덕, 꽃병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만들었지만 긴장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밤잠도 설쳐가며 만든 쌀 항아리 세트를 '서재원 작’으로 출품했다. 금속이나 도자기 등 대세를 이루는 소재가 아닌 짚을 가지고 정교한 작품이 나왔다는데서 심사위원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다소 아쉬운 장려상에 그쳤지만 색깔을 입히거나 가공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짚으로 새끼를 꼬거나 씨줄, 날줄로 엮어 만든 것치고는 엄청난 결과라는 것이 작품 출품자들 모두 이구동성이었다.

 

▲ 짚신

 

#될성부른 나무 떡잎 때 알았다
이렇게 손재주가 뛰어난 것은 젊었을 때부터 보은 근방에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농사도 농사지만 목수로 자식들 가르치고 형제들 가르치고 결혼시켰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1973년 당시 산외면에서 새 집으로는 가장 나은 집이라고 소문났던 자신의 집 안채는 물론 남의 집짓는 일에서부터 시집갈 때 혼수품목인 오동나무 장롱도 짜서 팔았고 두레판도 만들고 문짝도 짰고 책상도 만들어 팔았다. 목화씨 빼는 씨아도 만들고, 물레도 만들고 , 베틀도 짜고 소 등에 거는 질마도 만들고 써레도 만들고 흙쟁이도 만들고…. 그 때는 쇠로 만드는 것 빼고 나무와 짚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죄다 만들어 팔았다.
주문이 밀릴 정도로 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농을 만드는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공장에서 기성제품이 나오고 보은에 회사제품을 파는 농방이 생기기 전까지는 어르신의 전성시대였다. 이후에도 어르신은 갖추고 있는 연장을 이용해 윷과 지팡이를 만들어 면내 각 마을 경로당, 친지, 동갑계원과 새마을지도자, 6.25 전우회, 동네 주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장롱을 만들던 손기술이니 윷과 지팡이를 만든 솜씨가 오죽하랴. 그 손기술은 전혀 녹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르신은 지금 짚공예로 다시 전성기 적 영화를 누리고 있다. 오히려 세월이 흐른 동안 연마돼 새로운 기술로 승화 발전된 것이다. 어르신이 이렇게 매사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것은 청년시절 새마을지도자 교육 때 가슴에 콕 박혀 지금도 살아있는 '하면 된다’, '미쳐야 된다’는 그 신념 때문이다. 원래 성격도 똑 부러지는데다 교육을 받은 이후 대충 대충, 어영부영이 없고 맘에 들 때까지 끊임없이 연구해서 흡족해지지 않으면 손에서 놓지 않는다. 새마을지도자시절 신정리 새마을사업이 충북도의 견학장이 되고 훈장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 상을 받고 그 외 여러 기관에서 주는 각종 상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고령임에도 산외면 덕성산악회를 10여년 이상 이끌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르신의 공은 전시장에 진열된 각종 상패와 포창장만 봐도 알 수 있다.

짚공예로도 상을 받았으니 무엇이 더 바랄게 있으랴 싶었는데 어르신은 아직 자기에게 주는 숙제가 남아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보은재래시장활성화 사업장에서 짚공예를 하고 또 2009년과 2010년 내북면과 탄부면에서 짚공예를 가르쳤지만 자격증 없는 지도자여서 올해 안에 짚공예 지도강사 자격을 얻는 것과 명장으로 지정을 받는 것이다. 최고 권위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세월 때문에 욕심을 거뒀다.

그리고 올해 5천만원을 받아 사업자 등록까지 마친 내북 짚공예마을기업이 명실상부한 마을기업으로 자리잡아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숙제는 기업 대표인 어르신과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최문자씨 또한 숙제로 안고 있는 것이다. 짚공예에 옻칠을 입혀 보존을 용이하게 하고 실용성을 높이는 대책도 강구하고 있고 최문자씨의 특기인 삼베를 짚공예와 접목하는 등 사업 구상에 골몰해 있다.

서재원 어르신은 “내가 이렇게 짚공예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안사람 덕분여, 짚을 만지다 보면 집안이 온통 먼지여. 북데기가 대단하지. 내가 새끼를 꼬다말고 내 볼일 본다고 나오면 안에서는 아무소리 안하고 그걸 다 치워. 돈도 안되는데 왜 해서 지저분하게 만드느냐고 잔소리 하면 맨 날 부딪칠 테지. 하지만 군소리 한 번 안하고 내 뒤치다꺼리를 다해줘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라고 부인 황선희(84)씨에 대한 무뚝뚝한 정을 드러냈다.

화답이라도 하듯 황선희씨는 “내가 뭐 한일이 있어. 그저 뒷바라지 하는 거지 뭐." 부창부수다. 전국 공모전 수상소식이 터져나오면 이들이 부른 부부별곡이 인간극장 되어 세상에 감동을 줄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는 어르신의 삶에 존경을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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