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 오래된 달력
새롭고 오래된 달력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11.26 09:16
  • 호수 56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럼니스트 전 경 진
마로면 한중리

이제 12월 달이면 내년 달력이 나온다. 아마 달력 공급처에서는 연말에 공급할 신축년 달력제작이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지금 11월달은 경자년 정해월이다. 내년의 시작은 2월, 신축년 경인월이다.
요즘 사람들은 지금 달력을 단순히 시간의 집합체로 보는 것 같다. 일정을 정하고 일의 순서를 계획하는 스케줄 기능을 하고 노는 날과 일하는 날 일정을 잡는데 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활동했던 기록자료로 남겨놓기도 한다. 시간을 돈으로 보는 풍조 때문인지 한때 썸머타임같은 혼란도 있었다.
비슷한 이유로 지금도 우리나라는 동경표준시를 사용하기에 실제 시간과는 약 30분의 차이가 난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시간조차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람에 따라서 농가 달력에 붙어있는 경자년이니 정해월이니 하는 십간십이지가 다소 무용하고 오래된 군더더기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까지도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달력을 단순히 숫자로만 보지 않고 그 때에 해당되는 일진(日辰)과 절기까지 아울러 살펴보셨다. 일기예보만큼이나 달력은 농사에 있어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점쳐보는 것도 결국은 달력이다. 물론 지금과 비슷하겠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태어난 연월일시라는 별자리 사주를 간직하고 있어서 마치 자기 혈액형처럼 익숙하고 당연하게 일상에서의 일진과 운세를 점치면서 길흉을 짚어왔다. 길하다하면 희망과 의욕을 내어도보고 흉하다 하면 조심과 경계를 새겨 자중하면서 살아가니, 이를 참고로 삼으면 이런 게 삶의 측정기이고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좋다가도 나쁘고 나쁘다가도 좋은 것이 농사나 인생이나 다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음양오행순환을 기반으로 하는 달력에서 운명이고 일진이고 절기가 다 나온 것이고 이것이 사람 사는거나 농사짓는거나 원리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농경문화의 소산인 달력을 보면, 우리말로 일진(日辰)은 '해와별'이고, 농(農)도 풀어보면 '별의 노래(율려)'라고 이야기하니 서로 별자리로 풀어가는 점도 연관을 갖는다.
십간은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이고 십이지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이다. 이 글자들을 보면, 생명이 움트고 줄기가 자라고 양기가 퍼지고 잠시 숨을 고르다 이내 무성해지고 심이 생기고 열매가 달리고 무르익고 다시 온 힘을 내어 씨를 잉태하고 다시 흘러서 씨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동물과 식물을 놓고 볼 때도 생명의 생장소멸이라는 순환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농업은 줄곧 생명을 직접 다루는 분야이지만 사실 그렇게 보면 노동, 교육, 종교 등 모든 사회분야의 근본원리와도 만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질문은 결국 '생명'이 무엇인가 하는 정답을 찾기위한 과정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오직 '먹고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아무리 해도 생명의 문제 앞에서는 이것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어떻게 하든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밀려오는 이제부터는 '누가 얼마나'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가 더 중요한 질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건 부자도 고위층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오던 세상은 전환을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손쉬운 결과만을 추구하다보니 코로나19도 백신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믿고, 마찬가지로 경제위기도 기후위기도 인간의 삶의 질이라는 문제 모두 백신같은 한방에 풀릴 것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같은 패턴의 기술, 정치, 경제로는 해결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시대의 일진, 즉 세상이 돌아가는 운세가 근본을 회복하면서 다른 시대를 이끌어야 하는 절기로 들어섰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만 사람이 만들어놓은 기술이 역할을 제대로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달력이 필요없는 스마트농사, 순환을 끊어버리는 기계농사, 생명을 조작질하는 바이오농사로는 앞으로 한 치도 더는 유지 못하고 씨도 못맺는 계절을 불러올 것이다.
우리나라가 경제10위의 강대국이라고 해도, 그 힘이 자연을 부수고 사람을 내쫓고 직장에서 죽고 삶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10배의 소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언하건대, 농정을 제대로 바꾸면 국가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농정을 올바르게 바꾸려면 먼저 농업이 바뀌어야 한다. 농업의 전환은 자연철학과 생명사상, 농생태학이 기본이념으로 자리잡아서 땅이 유기질 가득한 건강한 토양으로 재생되면서 대기중의 탄소와 수분을 머금게하는 기본적인 순환과정들을 하나하나 이어가면서 출발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식량생산량과 판매, 공급, 경제소득같은 개념만 논의된다면 이를 기반으로 하는 어떤 농정과 제도도 제대로 된 해답이 되지 못할 것이다.
농업이 바뀌고 회복되면 도시의 많은 사람들도 거듭 한 목소리로 노래 불러줄 것이다. 지구별 사람들이 별의 노래, 농(農)을 불러주면서 백년의 사회와 교육도 함께 바꿔가길 기대한다. 올겨울, 모두에게 내려지는 새로운 달력을 받으면서 나는 아주아주 오래전 선인들이 내려주시는 새롭고도 오래된 우주를 하사받듯이, 경외롭고 환희로운 새로운 농업의 새로운 연호를 저마다 선포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해와 별의 노래가 흥얼거리는 꿈을 꾸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