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년 창리를 지켜온 만물상 옥창상회
53년 창리를 지켜온 만물상 옥창상회
  • 심우리
  • 승인 2020.11.05 09:37
  • 호수 56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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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판매해 온 옥창상회

택시운행 하면서
사람들을 돕는다는 김창규씨
53년 창리를 지켜온 옥창상회.
53년 창리를 지켜온 옥창상회.

오래된 가게는 한 지역의 역사를 함께한 유산과도 같다. 긴 세월 자리를 지키며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주기도 하고, 옛 기억을 떠올리며 나눌 수 있는 이야깃 거리가 되기도 한다. 특히 사람이 많은 곳도 아니고 산업화를 맞으며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겨우 3만2천여명에 불과한 보은 같은 소지역에서는 오랜세월 한 업종을 유지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행도 달라졌고 시대도 달라졌고 트렌드도 빠르게 바뀌는 세파에도 묵묵히 동일 업종으로 가게를 계속 이어가는 자체가 힘든 것이 요즘이다.
그럼에도 50년이 넘는 세월 내북면 창리를 지키고 있는 옥창상회는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이야깃 거리가 많은 듯 보였다.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 들어간 옥창상회에서는 마실나온 어르신들이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옥창상회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부탁드리자, 가게를 보고 있던 남순자(74)씨는 진짜 사장님이 자리를 비웠다고 조금 기다려달라며 미소를 띄운다. 조금 기다리다보니 옥창상회의 진짜 사장(?)인 김창규(76)씨가 가게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찾아와 드린 부탁임에도 김창규씨는 흔쾌히 수락하며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돈 보다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는 김창규·남춘자 부부.
돈 보다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는 김창규·남춘자 부부.

#23살 젊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
김창규씨는 1944년 내북면 화전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여느 가정과 같이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형제들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던 중 김창규씨 형제들에게 청천병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바로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김창규씨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무렵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형제들은 농사를 짓고, 김창규씨는 청주에 있는 지인의 점포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 정도 일했을 때, 일하던 점포를 그만두고 다시 보은 내북으로 돌아와 창리에 옥창상회를 세웠다. 23살 때였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판매한다는 옥창상회. 청소도구부터 공업도구까지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판매한다는 옥창상회. 청소도구부터 공업도구까지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다.

#트렌드에 맞춰 변화해온 옥창상회
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난 직후부터 점포에서 일했던 김창규씨는 일하는 동안 나름 사업수완이 생겼다고 자부했다. 그래서인지 옥창상회를 운영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맞게 그때그때 사람들이 많이 찾는,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을 팔거나 그에 맞게 사업을 확산시키곤 했다.
김창규씨가 처음 옥창상회를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는 농기구가 인기였다고한다. 지금이야 트랙터나 경운기 같은 기계화된 농기구나 운송수단이 있다지만, 처음 옥창상회를 열었을 당시에는 쟁기나 소달구지 등의 농기구를 사용했던 때라 옥창상회에 농기구들을 팔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런 농기구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에 김창규씨가 예상한대로 장사가 잘 됐다고한다. 그렇게 약 3년 정도 농기구를 팔고 있을 때, 또 다른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김창규씨가 옥창상회를 운영하기 시작하고 3년 쯤 되던 해에 또 다른 사업을 찾아냈다.
당시 보은 시골 동네는 대부분 초가 지붕을 사용하는 초가집이 많았는데,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면서 초가지붕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교체하는 사업이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김창규씨는 이를 놓치지 않았고, 내북에 슬레이트 지붕사업을 하는 대리점을 차려 농기구를 파는 옥창상회와 함께 운영했다.
혼자서 두 사업을 모두 소화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옥창상회는 아내에게 맡기고 슬레이트 지붕과 시멘트 사업에 집중했다.
또 다시 시간이 흘러 농기구들이 기계화가 되고 기존의 소달구지나 쟁기가 쓸일이 없어지자 농업용 비닐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농업용 비닐 역시 사람들이 농업용 비닐을 많이 찾기 시작한 시기에 맞춰 시작한, 시대의 흐름에 맞춘 김창규씨의 또 다른 사업 수완이었다.
농사꾼들이 농업용 비닐을 사용했을 때 농작물의 수확량이 농업용 비닐을 사용하기 전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하우스나 밭 고랑에 씌우는 농업용 비닐을 많이 찾게 된 것이다.
김창규씨는 농업용 비닐 사업을 단순히 내북에서 그치지 않았다. 옥창상회에서 뿐만아니라 직접 차를 끌고 보은, 상주, 영주, 괴산, 진천, 청양, 무주 등을 다니며 도매업도 병행했다. 그렇게 옥창상회와 도매업으로 농업용 비닐 장사를 13년 정도 했다고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 우선 김창규씨는 농업용 비닐 도매업을 그만두고 개인택시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옥창상회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춰 조금씩 변화를 거듭하다 보니 이것저것 다양하게 판매하는 만물상으로 변했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변화를 거듭하던 옥창상회는 지금은 삽이나 낫 등의 농기구부터 못이나 나사 등의 철물과 집에서 사용하는 제품 등 이전처럼 하나의 품목이 인기를 끌어 많이 판매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시골마을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생활하면서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다.
변화한 것은 옥창상회 뿐만이 아니었다. 비록 시골 마을이었다고는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도 줄어들었고, 그만큼 옥창상회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도 조금씩 줄어 이제는 간혹 내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한번 씩 방문하는 것이 전부다.
그렇지만 김창규·남순자 부부의 얼굴에는 근심은 커녕 활력이 가득하다.
"장사를 해도 나 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게 아니야. 돈이야 많이 벌리면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사람들이 필요할 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가 정말 감사하고 좋은거야."
53년 동안 옥창상회를 운영하면서 돈보다는 사람을 우선했다는 김창규씨.
지금은 개인 택시를 운행하면서, 몸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나 베트남 이주여성들을 위해 보은읍과 청주뿐아니라 필요하다면 서울과 인천공항을 드나들며, 어르신들의 병원 수속부터 베트남 이주여성 가족들의 공항 수속을 돕는 일까지 자처해서 하고 있다고 한다.
장거리 운행을 하면 돈을 많이 받을 법도 한데, 김창규씨의 택시는 오히려 저렴한 가격에 운행한다. 가격이 저렴해서 인지, 이런 친절함 때문인지 아는 사람들은 보은읍을 나가든, 먼 곳을 가든 필요할 때는 김창규씨 택시만 찾는다.
장사가 잘 되는 것 보다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는 김창규·남순자 부부는 주변에서 그만두라고 만류해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힘이 있는데 왜 그만둬. 나 힘 닿는데 까지 택시 몰고 다니면서 나 필요로 하는 사람들 돕고싶고, 여기 옥창상회도 택시 그만둘 때 까지는 계속 하면서 내북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할거여."
문의 : 043)542-0022
운영시간 : 항시가능(새벽에도 가능)

목제틀에 보관되어 있는 못. 찾는이가 거의없어 녹이 슬었다.
옥창상회와 오랜세월을 함께 해온 선반에는 이것저것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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