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고 비우기
덜어내고 비우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11.05 09:32
  • 호수 56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칼럼니스트 최 생 호
(문화충전소 가람뫼 대표, 강산리)

낙엽이 진다. 떨어뜨린 나무도 떨어지는 잎들도 아무런 아쉬움이나 미련이 없다. 한 없이 가볍고 자유로운 낙화가 아름답고 부럽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고즈넉함도 여유롭고 평화롭다. 산과 들은 비우고 덜어내며 그렇게 스스로 생존과 공존의 길을 열어간다.
사람이 머무는 곳엔 여전히 넘치는 세상, 부족함이 없는 시절이다. 그래도 많은 이들의 삶은 허덕이고 고달프다. 한편에선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며 아우성이다.
잘난 사람, 꽉 채워진 듯 보이는 사람, 너무 많이 가져 넘쳐 보이는 사람, 많이 알고 많이 가진 듯 포장된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가? 라는 물음 앞에 마주한 현실은 그래서 인지 늘 막막하고 불안하다.
처음, 뭔가를 채우기 위해 준비된 그릇은 적당했다. 열심히 준비하고 노력해서 차곡차곡 그릇을 다 채웠다. 그걸로 충분했다. 더 이상 바랄게 없는 데 누군가 더 큰 그릇을 내민다. 그 만큼도 채웠으니 이 정도 크기는 금방 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다시 부지런히 채운다. 함께 채워 주겠다는 사람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시간은 흘러 악착같이 해냈다. 정말 이만 하면 됐는데, 또 다른 누군가 더 큰 항아리를 보여 준다. 자존심을 건드리며, 달콤한 말로 부추긴다. 자신의 눈에도 그 커다란 항아리가 부러워 보인다. 그래 마지막으로 이것만 채우고 끝내자. 발버둥 치며 모든 걸 던져 채우고 돌아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큰 항아리에 채워진 건 단지 나의 욕심과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돌아보니 처음 준비한 항아리는 작지만 단단하고 멋스러웠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내어주고 보여준 항아리였다. 곳곳에 금이 가고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커진 만큼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무심한 세월만 흘러 몸도 마음도 허물어지고 있었다. 넘치는 세상에 다 가질 수는 없다. 다 가질 필요는 더욱 없다. 많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많을 뿐이다. 정작 필요한 건 극히 일부다. 중요한건 정말 필요한 게 뭔지 생각하고 판단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 지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 치는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내 것이 넘치면 더 큰 그릇을 준비해 채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릇을 준비하고 채울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작물도 마찬가지다. 조금은 부족한 듯 적당한 거리에 있는 거름과 물이 오히려 뿌리와 줄기를 강하게 한다. 스스로 왕성한 힘을 발휘해 튼실하고 맛 좋은 열매를 맺는다. 병충해 방제를 위해 뿌리는 약도 마찬가지다. 넘치게 뿌리면 금방은 효과가 좋겠지만 오래 가지 않아 더 강하고 변이된 종들이 나타난다. 내성이 생긴 새로운 해충들을 잡기 위해 더 강하고 독한 약을 살포하게 된다. 물고 물리는 관계가 반복되고 문제는 어느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몇 년 사이 굴지의 재벌 회장들이 연달아 70대에 생을 마감했다. 넘치는 재력과 자본의 위세로 얻은 권력에 호화로운 삶을 살며, 최고의 의료진이 세심하게 관리해준 건강까지,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호사를 누린 그들의 삶은 100세 시대를 부르짖는 요즘, 너무도 빨리 무너져 내렸다. 결국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빈손으로 떠났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가지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주셨던 법정스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 그동안 풀어 논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신다며 본인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떤 번거롭고 부질없는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관과 수의는 절대 만들지 말고 내가 입던 옷을 입혀서 태우고 타다 남은 재는 봄마다 나에게 아름다운 꽃 공양을 바치던 오두막 뜰의 철쭉나무 아래 뿌려 달라. 그것이 내가 꽃에게 보답하는 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무소유의 참 의미를 일깨워 주셨다.
낙엽이 지는 만추의 시간, 우리의 일상은 흘러가고 새로운 날들은 기약 없이 다가온다.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와 시련은 유한한 시간 속에서 걷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밀려든다.
자본에 종속된 물질만능, 풍요의 시대에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라는 '과유불급'의 의미가 무색하지만 거침없이 덜어내고 비워내는 자연의 변화와 흐름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달도 차면 기운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마지막엔 빈손이다. 푸르던 잎들도 형형색색 물들고 모든 걸 비워내며 바람 따라 하염없이 내려앉는다.
깊어가는 가을, 사유와 통찰의 시간을 통해 홀가분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 이 순간이 그 자체로 인생의 값진 선물이다.
덜어내고 비워낸 앙상한 나무만이 새 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도 '텅 빈 충만'으로 가득하길 소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