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회인의 역사를 함께한 회인약방
58년 회인의 역사를 함께한 회인약방
  • 심우리
  • 승인 2020.10.15 09:53
  • 호수 5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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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픈 회인 사람들에게
병원과도 같았던 회인약방
58년동안 회인을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판매하고 있는 회인 약방의 모습.
58년동안 회인을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판매하고 있는 회인 약방의 모습.

보은에서도 읍소재지 특히 시가지와 면 지역에서도 사람 없는 한적한 길로 더 들어가면 낡고 오래된 풍경들이 눈 안에 들어온다.
회인은 과거 현을 이룰 정도로 보은에 버금가는 큰 고을이었지만 지금은 사람 구경하기 힘든 정적이 흐르는 공간이 됐다.
현의 중심지, 현감의 집무공간인 관아. 인산객사 등 화려했던 회인 중심지 중앙리도 지금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로 변했다. 과거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앙리 길을 걷다보면 마치 드라마의 배경이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이 있다.
간판에 '회인 약방'이라고 써 있는 이곳은 약국이라는 명칭이 더 익숙한 젊은 기자의 눈으로 봤을 때 신기하기만 하다. 살짝 열려있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보니 회인 약방을 운영하고 있는 황규설(91)씨가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안 쪽 방에서 나온다. 회인의 옛 이야기와 회인 약방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이른아침 연락없이 찾아갔음에도 안쪽으로 들어오라며 자리를 잡고 옛 이야기 보따리를 주섬주섬 풀어놓기 시작한다.

#6.25전쟁 참전부터 회인약방을 차리기까지
황규설씨는 공주 유구면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러던 중 18살이 되는 해에 학도병으로 군대에 징집됐다.
당시 6.25전쟁을 겪고 약 8년을 군에서 복무하다 헌병 상사로 전역을 했다. 전역을 하고 나니 직업도, 갈 곳도 없었다. 다행히도 청주에 살고 있던 처갓집의 도움으로 청주에 정착할 수 있게 됐다.
처음 청주 왔을 때에도 직업은 없지, 아이들은 커 가지, 먹고 살길을 찾다 가 지인으로부터 경사로 들어올 것을 추천 받았으나 처갓집 반대로 거절했다. 그렇게 일자리를 계속 찾던 중 우연한 기회로 청주에 있는 한 약국에 들어가 5년 정도 일하고 약업사 자격증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취득했다.
약업사 자격도 취득했고 어디에 약방을 차리는 것이 좋을까 물색하던 중 보은 회인면에 약방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황규설씨는 그렇게 33세의 나이에 회인에 입성해 약방을 차려 운영하기 시작했다.
회인에서 황규설씨가 맡았던 일은 약방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각 면당 1개 예비군 중대가 창설 됐고, 황규설씨는 회인면에 창설된 예비군 중대에서 2중대장 직책을 맡아서 했었다. 또 대의원 선거에서 선거인단에 당선되어 선거인단으로 10년, 평화통일정책자문의원 15년을 했다고 한다.
약방 운영에, 예비군 중대장에, 대의원으로 일하는 등 바쁘게 살면서 자녀들 대학도 보내고, 그 때 쌓은 인연으로 아들딸 시집, 장가도 보내고 했다고 한다.

#약방 운영으로 5남매 대학까지...
황규설씨가 처음 회인에 약방을 차렸을 때, 회인에는 약방은 물론 병원이나, 보건소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회인에서 몸이 좀 아프다 하면 너도나도 회인약방을 찾았다. 당시 회인의 인구가 지금과는 다르게 1만2천여 명이 살고 있었다. 유동인구 까지 생각하면 그 수가 꽤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감기가 걸리거나 설사가 나거나 해서 몸이 아프다 싶으면 회인약방만 찾으니 추석 전후로는 하루 매출이 백만원이 나오기도 했다. 황규설씨는 그 돈으로 자식들 고등학교도 졸업시키고, 대학도 보냈다. 지금이야 자녀들 대학보내는 것에 교육비가 많이 들어도 대부분 대학을 나온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를 보내는 것도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한다.
우선 회인에서 자녀들 고등학교를 보내려면 보은으로 보내거나 청주로 보내야 했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보은이나 청주로 나가는 버스가 없었다. 결국 보은으로 나가는 수리티재나, 청주로 나가는 피반령을 걸어서 다녀야 했다. 또 청주나 보은을 걸어서 다녀야 하다보니 통학을 시키기 보다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을 살게 했는데, 하숙비만 한달에 쌀 2말씩은 내야했다. 황규설씨는 슬하에 1남 4녀로 5남매가 있으니 고등학교 보내서 내준 하숙비만 1달에 10말 정도 된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다 보니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 고등학교도 보내지 못해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참다못해 누군가가 미군부대에 있는 패차를 망치로 두들기고 용접하고해서 제법 버스처럼 꾸며 운영하기도 했는데, 오래 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회인약방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규설씨의 표정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33살 무렵 회인에 넘어와 58년째 약방을 운영중인 황규설씨.
33살 무렵 회인에 넘어와 58년째 약방을 운영중인 황규설씨.

#하나, 둘 회인을 떠나기 시작한 사람들...그리고 현재
회인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한 것은 3차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부터였다. 도시에 공장이 생기고, 도시로 나가는 길도 이동이 편하게 포장 되는 등 도시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자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 공장에서 일해서 돈벌고, 여자들도 시집을 도시로 가서 도시에 나가서 살고 하는 등 사람들이 회인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황규설씨의 자녀들도 5남매중 3명이 서울에 올라가 일하면서 살았다. 그렇게 회인에 인구가 줄고 줄어 지금은 1천500명 남짓 남아있다.
학생수가 수천명은 됐던 회인 초등학교는 이젠 유치원생들까지 포함해 35명 정도만 남아있다. 그마저도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덕에 유지되고 있는 상황.
회인의 중앙리 거리는 이제 더이상 예전과 같은 활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회인 약방을 찾는 손님들도 이젠 거의 없다. 가끔 무릎 아프고 허리아픈 할머니들이 와서 약을 타갈 뿐이다. 찾는 손님이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황규설씨는 매일 같이 약방의 문을 열어둔다. 언제 사람들이와서 약을 찾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고, 찾는 사람이 없다고 마냥 문을 닫아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면허가 있는데 2022년에 갱신을 해야 되거든. 근데 뭐 나이 90에 차끌고 나가봐야 청주가서 맛있는거나 사먹고 들어오는 거지 뭐. 이번에 면허 갱신하라고 할 때 까지만 하고 약방도 그만하려고" 황규설씨는 그렇게 회인약방의 끝을 예고했다.
비록 지금은 찾는이가 거의 없는 허름한 약방이지만 58년을 함께해온 약방인지라 당장에 그만두지는 못하겠는지 면허 갱신을 핑계 삼아 2년 동안 이별을 준비하는 기간을 두는 듯 했다. 비록 회인약방이 60년 운영을 끝으로 막을 내리겠지만 회인 약방은 회인의 한 역사로서 회인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 될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문의 : 043)542-8817
주소 : 회인면 회인로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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