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밝고 맑게
추석을 밝고 맑게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9.24 09:16
  • 호수 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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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경 진
마로면 한중리

"코로나로 시절도 어수선하고 너희들도 번거로울테니 이번 추석에는 오지 말거라. 차례도 올해는 넘어가련다" 금초를 끝내고 형제누이가 모인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쓸쓸히 말씀하신다.
아무래도 코로나로 걱정되어서 그러시겠지만 평생 증조부모 제사와 명절제사까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챙기시는 분께서 올해는 웬일로 안하시는가 생각하면서도 아무튼 서로 바쁘게 눈치를 살피다 아버님의 진심을 확인하고 나서는 형제들이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당연히 제수씨나 아내도 표현은 안했지만 서운하거나 싫은 건 적어도 아니다. 기운없어 보이는 아버님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이제 차례제사 부담도 없고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형제들과 부인들이 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럼, 추석 당일날 부모님 집에서 가족 형제들 모두 모여 맛있는 거 먹고 놀아요."자녀와 며느리가 모두 선뜻 말씀드리니, 떨어져 살며 자주 보지는 못하는 자식 손자들이 오랜만에 찾아와 부모님을 뵙고 즐기는 자리를 어느 부모가 마다하겠는가? 몹시 반갑고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올해 추석은 차례제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막내가 아버님의 하달 말씀을 전한다. 아버님 말씀하시길,"너희들 어차피 모두 모이는 거니, 이번엔 정말 간단하게 음식(나물, 전, 탕)하고 과일(대추, 밤, 사과, 배, 감) 조금만 올리고 차례 올리자. 그렇다고 부담갖지는 말아라..." 역시는 역시인가보다... 올해 추석도 당연히 차례제사를 모신다. 코로나가 걱정되어 오지 말라고 하신 것인데, '어차피 음식 각자 싸가지고 부모님 집에 다 모여서 식사할 것 같으면, 그 음식들 차례상 올리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는가' 하고 다시 생각이 바뀌신거다. 아무래도 좋다.
요즘 세태는 추석을 워낙 연휴개념으로 보기도 하고, 과거보다는 종교적 관점 차이도 다양해져서 꼭 유교식 전통으로 음식을 상에 올리고 절을 드리는 방식을 하지 않는 가정이 늘고있다. 그런데 차례가 꼭 유교가 있고나서 생긴 유교의 고유 전유물은 아니다. 인류의 문명과 의식이 농경에서 시작되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추수제나 추석제례는 축제의 형태로 농경문화의 정수를 표출해왔다. 그리고 농경문화의 정수는 바로 태양에 대한 숭앙이었다. 그 해의 기운을 머금은 햇곡식과 햇과일, 햇빛으로 말린 음식들, 햇빛으로 자란 바다생물들, 이 모두 태양이 직접 빗어낸 생명들이고, 이 제물에 깃들어 있는 태양의 생명력은 다시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서로 나누는 한 마당이었다. 하늘과 땅에 고하는 것에는 한 치의 그늘과 어둠도 깃들어있지 않은 것이었으니 이 음식을 다함께 나눠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즐겁고 힘찼겠는가 상상해 본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기록에 의하면 옛부여와 옛동예, 옛삼한의 백성은 지위고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음식을 먹으면서 삼일 내내 놀고, 놀고 또 놀아도 지치지 않고 지루하지 않고 지나치지 않았다 한다.
이번에 아버님께서 제사를 정말 간단하게 하신다고 하니, 이번 추석은 한치의 어둠도 깃들지 않은 신성한 음식을 장만해봐야겠다. 태양을 직접 마신 땅의 귀한 작물들과 땅의 정수를 흠뻑 먹은 물의 귀한 생명들이 무언지도 생각해보고 조상과 내가 다함께 즐거이 먹을수 있는 공통의 먹거리는 과연 무엇인지 정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을 가족과 나누고 부모형제가 나누고 이웃도 드시라고 접시에 담아 나눠보면 모두 태양처럼 밝아지는 마음을 나눠받는 것은 아닐까?
사실 올해는 정말 경제적으로도 농사환경으로도 참 어려운 한해였다. 그런데도 남을 돕는다거나 단합해서 어려움을 극복해가려는 공동체정신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흔하게 사람들 하는 말들이 '내 코가 석자'라고 한다. 석자코 가진 사람들만 늘어나니 네 코가 석자인 사정을 봐줄 사람도 당연히 없는 거다. 자기 코가 석자면 누가 잘라줄 수가 있는 게 아니다. 오직 태양을 흠뻑 받아야만 그 석자코가 절로 줄어들 것이다. 곰팡이 같은 어둠은 햇빛에 정화된다. 정치도 꼼수와 책략보다 따뜻함과 철학을 지향해야 한다. 경제도 낙수효과니 투기니 금융상품이니까 아니라 태양 아래 당당한 노동과 공익적 가치와 취약계층을 배려하는 경략을 논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보건, 교육, 농업 모두 디지털이나 기술기능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일상과 직결된 몸과 마음에 관한 것들은 경쟁과 상품으로 바라보는 순간 반드시 끔찍한 결말을 가져올 것이다. 오히려 미래기술이 아니라 예부터 내려오며 축적된 지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맞게 적용하고 활용해가며 이어가야할 분야이다. 몸과 마음을 논하는 경전에 길이 있다. 옛 진리는 어느 한 부분도 태양처럼 밝고 밝으라고 하지 어둡고 음침해야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번 추석차례에는 태양을 한껏 놓고 양명한 기운을 흠뻑 마시고 먹자.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리고 밝아지고 따뜻해져보자.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코로나 질병들과 너무 커서 볼 수 없는 기후재난과 경제문제들도 밝은 태양의 마음밭으로 끄집어내어 펼쳐 널어보자. 아마도 하늘과 땅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많은 문제들에 해결의 길을 비춰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오랫동안 그러했듯이 말이다. 보은군민 모두가 더도말고 덜도말고 복된 한가위 보내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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