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로 한중/한살림
처서가 지나면서 칠월칠석이 지났다. 처서에 비가 오면 작물이 흉년이라고도 하지만 칠석날 내리는 비는 지역에 따라 길흉에 대한 개념이 상존하고 있다. 칠석비가 사람들 마음을 씻어주고 병은 쫓아주는 것과 관련을 가지면서도 곡식이나 해초의 풍흉을 예측하는 관점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사실 처서부터 추석까지의 비는 작물에 별 도움이 안된다. 그러나 풍속에서는 액을 쫓는 칠석비를 병을 고치고 부정을 지우고 오래된 것을 갈아주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인지 하늘에서 칠석비 오신다 하면서 견우와 직녀의 내림물이라고 믿었다. 별에서 내려오는 물방울 하나하나에 농사짓는 견우와 비단짜는 직녀의 만남과 헤어짐, 슬픔과 기쁨의 정수가 깃들어서일까? 손님과 은혜를 상징한다는 까치와 까마귀들까지 둘의 만남이 이어지도록 오작교를 만든다는 설화는 어찌보면 참으로 애틋하다.
칠석날 즈음 우리 상황을 보면 정말 액막이라도 해야 할만큼 착찹하다. 기후위기는 농사꾼의 농사를 빈손으로 만들어놓고 코로나위기는 일꾼의 일터를 멈추게 만든다. 홍수에 풍비박산이 났는데 겹겹이 태풍까지 몰려온다. 잠잠해질 듯 보이던 코로나19도 전국에 확산되면서 보은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하였다. 스프레이 뿌리듯 번지는데다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질병이라 두려운 마음을 넘어서 위축과 경직된 불안감만 더해진다. 내가 격리당하지 않기 위해 마음속에서부터 남을 격리하려는 배타심만 커지다보면 결국 이후에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오히려 이렇게 질병, 경제, 자연환경 가리지 않고 어려워지는 때에 서로 돕고 결속해가는 마음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할 진짜 힘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칠월칠석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의 이야기로 생각해보았다. 이야기의 배경부터 살펴보면 견우와 직녀의 만남과 공동파업에서부터 시작한다. 견우와 직녀는 둘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세상 부러울 것이 뭔가? 그런데 농부가 농사짓지 않고 직녀가 생산하지 않으니 하늘이 온통 난리가 난다고 한다. 이건 다른 말로 소(牛)모는 농부와 베짜는 일꾼이 스스로 자립하는 존재라는 뜻이고 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생산된 산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세상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천제님마저도 농사꾼의 밥을 먹고 직녀가 짠 옷을 입는다. 오직 견우는 직분을 다하여 생명의 먹거리를 나누고, 오직 직녀는 직분을 다하여 생활의 직물을 제공해왔던 것이다. 우리로 보면 마치 노동자와 농민이 음으로 양으로 만나서 세상을 돌아가게 하고 새로운 세상도 같이 꿈꾸어보았다는 것이고, 만약 그것이 그대로 된다고 그게 바로 참세상 아니겠는가? 노동자와 농민 스스로 얼마나 위대하고 강한지 자각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우선 족하다. 그리고 같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면 뭐든 바꿀수 있다.
다음 이야기의 과정을 살펴보면, 견우와 직녀의 만남이 오직 한번이라는 것에 주목해본다. 모든 것에는 시기와 조건이 맞아야 한다. 농사도 때가 있고 땅에도 맞는 작물이 따로 있다. 때를 모르고 심고 땅에 맞지도 않는 작물을 키우려 들면 낭패볼 확률이 높다. 음력 칠월칠일은 7이라는 성숙한 양(陽)의 숫자가 중복되면서 절정을 지나고, 절기상으로는 처서를 맞아 양이 본격적으로 꺾이는 교차기이고, 하지이후 심어진 음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올라오는 철이다. 세상에는 철이 지나도 하던 놀이나 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부른다. 지금의 때는 크게보아 인류문명의 칠월칠석이다. 과거와 달리 모든 관념과 철학과 의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만 살아남는 때이다. 질병, 기후, 경제 모든 양상이 바뀌고 있고 지구역사상 여섯 번째 대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여전히 백신, 과학기술, 스마트시설, 돈의 힘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체제로 이 모든 전면적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철부지라 아니할 수 없다. 평생 지녔던 관행과 습성도 상황이 바뀌니만큼 서서히 꾸준히 노력하고 변화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면 분명히 달라진다. 지금 우리는 절망보다는 해야할 일에 집중하고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 어떻게하면 공공성을 확보하면서도 생태환경과 조화를 이룰것인지 더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논의되는 농민기본헌법제정과 농민기본소득, 그리고 환경보전형농업이라는 일련의 농업관련 주제는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제 견우와 직녀 이야기의 마무리와 개인의 실천을 제안하는데 있어 '삼일신고'라는 경전에 나오는 조식, 지감, 금촉이라는 용어를 조심스레 빌려본다. 첫째는 조식(調息)이다. 숨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제생활인 생산과 소비도 숨을 고르는 것처럼 한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지점이 은하수에 놓인 오작교에서 만났듯이 음과 양은 균형점에서 만난다. 우리는 소비하는 것만큼 생산하고 자연이 수용하는 것만큼만 생산해야 한다. 탈성장경제의 개인적 생활지침이고 순환의 고리가 끊어지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더하고 빼면 영이 되는 지점이야말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고르게 가라앉는 자리이다. 두 번째는 지감(止感)이다. 감정을 멈춰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지금 여기를 자각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정을 먼저 앞세우고 판단해왔다. 지금처럼 가짜가 판치는 시대는 사물의 진실을 직면할 수 있어야 왜곡과 분열로 힘이 소모되지 않으면서 눈뜨고 이용당하지 않을수 있다. 자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감정이 참된 인간의 감정이다. 만남과 이별이 하나이기에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칠석물이 내려 만물을 씻겨주는 것이다. 셋째는 금촉(禁觸)이다. 감각과 욕망을 제어하여 외부의 기운하고 부딪히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외부기운에 끄달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지만 이제껏 사적인 욕심을 전혀 억제하지 않고 마음껏 허용해온 풍조가 지금의 모든 불행을 야기했다고 볼 수 있다. 단순한 욕구의 억압이 아니다. 욕망을 이해해야 자연환경과 몸을 함께 해치는 외물을 경계할수 있다. 견우와 직녀는 스스로 직무를 수행하면서 부딪힘을 금하는 결계를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남을 위한 직무를 수행하며 홀로 서고 홀로 걷고 홀로 머물러야 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 괴질이 난무한 질병의 시대에 더욱 절실한 강령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의 말은 모두 개인적 소회에 불과하다. 그러나 방식이야 어떻든 우리가 과연 개인에서부터 전 세계로 닥쳐오는 이 거대한 액을 막을 수 있는가? 답은 당연히 액막이할수 있다이다. 오직 의지의 문제이다. 다만, 겸허히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