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 심은데 나락 걷고, 마음 심은데 글씨 캐고"
"벼 심은데 나락 걷고, 마음 심은데 글씨 캐고"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8.20 09:53
  • 호수 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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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사람, 이금선 어르신 (1946~, 75세)

무논에 올챙이 놀고 개구리 울더니 어느덧 논우렁이들이 터를 잡았다. 조평벼, 중생종, 만생종, 6월 이모작까지 벼들은 모두 논에 심겨진 채 장맛비를 맞고 있다. 나직한 들판에 추억이 자박자박 걸어간다. 내 어린 날의 강변으로 이어지는 논둑길은 길고도 아슴하다. 잔잔한 발자국이 시나브로 내 가슴에 흔적을 남긴다. 오래토록 잊고 있었던 그 길을 비로소 오늘, 65년 전의 논둑길을 걸으러 간다.

내 나이 열 살 이었던 어느 여름 날, 초여름 볕이 따끈따끈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려 머리 밑이 아팠다. 콧잔등이 땀이 송송 돋았다.
보리를 베어 낸 논에 써레질하여 물을 받았다. 이모작 하는 보리는 물 빠짐이 좋아야 했고 벼는 물에서 계속 자라므로 물이 안 빠지게 가둬야 했다. 
아버지가 멍에 얹은 소에 쟁기를 매고 논을 가는 동안 나는 논우렁이를 잡고 미꾸라지를 잡았다.

느릿하게 기어가는 논우렁이는 잡기가 쉬웠지만 미끈미끈 미꾸라지는 손가락 사이로 잘도 빠져나갔다.
녀석과 실랑이 하느라 적잖이 힘을 뺐었다.
내 어머니는 점심을 이고 논둑길을 걸어오셨다.
밥과 반찬이 담긴 함지는 머리 위에 막걸리를 채운 주전자는 오른 손에 들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다가 논둑에 미끄러졌고 어머니 발을 걸었다.
흰 쌀밥과 맛난 반찬이, 아버지가 학수고대 기다리던 막걸리를 모두 쏟았다.
나는 그 날 몇 대쯤 매를 맞았던가?

내 나이 스물일곱 노처녀가 되어 5남매의 맏며느리로 시집을 왔다.
시부모님은 내 친정 부모님과 연세가 비슷하셨다.
논 몇 마지기에 밭이 몇 마지기 가난한 농부의 삶 풀매고, 거름 뿌리고, 콩밭 매고, 고구마 캐고, 모를 심고, 보리 갈고, 삼 농사짓고, 베를 짜고 세월이 어찌 흐르는지 모르게 살다보니 줄줄이 딸이 태어났다.
셋째를 낳을 때까지는 곧 아들 소식이 있겠지,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딸이 여섯까지 되었다.
숨죽인 곡소리가 문풍지를 넘었다.

고향 동무 중에 말남이 생각이 났다.
그 집이 하도 딸만 낳으니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칠공주집 막내인 내 친구는 말남이가 되었다.
나도 여섯째는 말남이로 지을까 말까 하는데 그래도 지 아부지가 '사람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중한디!' 하며 만류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낳은 아이가 아들이라 맘이 턱 놓이면서 막둥이 낳고 나서는 몸도 추스르고 미역국도 편안하게 먹었다.
자식 키운다고 분주하고, 시부모님 모신다고 바쁘고, 정신없는 나날이 흘러가는 동안 내 삶은 그 속에 물처럼 스며들었다.
내 삶은 흔적도 없이 가족들 속에 묻혀갔다.
딸 둘은 고등학교, 딸 넷은 전문대학교, 아들은 대학까지 보내느라 없는 살림에 내 등골은 휠대로 휘었다.
못 먹고 못 입혀도 공부는 시켜야지 배워야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것 같았다. 내 한을 자식들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불 꺼진 집에 들어서면 허전하고 외롭다. 그럴 때는 책을 꺼내 든다. 공책을 편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글씨를 쓴다.
남은 인생 즐기면서 살자. 새로 만난 친구들과 알콩달콩, 도란도란 수다도 떨고 깔깔대고 웃으며 재미있게 사는게지.
스카프 목에 걸어 멋도 부려보고 빨간 블라우스, 분홍티셔츠, 파란 바지, 하얀 핸드백, 가끔은 굽 있는 구두도 신어볼까.
이제 꽃길만 걸어보자. 내가 만든 꽃길 말이야.
김경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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