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아, 내 품에 목화솜처럼 포근히 안겨봐"
"인생아, 내 품에 목화솜처럼 포근히 안겨봐"
  • 김경희 시민기자
  • 승인 2020.07.30 09:44
  • 호수 5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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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사람, 양입분 (1941~, 80세)

한겨울 내내 냉동실에서 잠자던 쑥을 꺼냈다. 귀한 손님을 맞는 살가운 손길이다. 큰딸이 서울에서 내려온단다. 쌀과 데친 쑥을 한데 섞어 빻아 냉동실에 보관했던 것을 어젯밤에 꺼내서 녹여 두었다. 큰딸은 쑥버무리 보다 쑥개떡을 더 좋아한다. 도착하면 갓 나온 쫀득쫀득한 쑥개떡을 먹여야지. 큰딸은 남매를 두었는데 막내 손주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담근 김치를 갖다 먹었다. 이제는 나와 동생들에게 김치를 담가주고 있다. 나를 살뜰히 챙기며 동생들의 고민도 잘 들어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맏이답게 아들 몫까지 다한다. 목화솜 같이 따뜻한 우리 딸.

 

#목화솜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싶었지
나는 1남 4녀중 셋째로 청주에서 태어났다. 연년생으로 낳은 동생을 등에 업은 친정엄마의 손을 잡고 피난길을 떠났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청주에서 제일 큰 공장은 남한제사였는데, 누에고치로 명주실을 뽑아 일본에 수출했다. 출퇴근 시간이 되면 청주 서문다리에서 사직동 제사공장까지 바삐 걷는 아가씨들이 빼곡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누에고치를 삶아 실을 빼고 난 '번데기'를 사러 장사꾼들이 몰려왔다. 나는 열아홉 살에 방직공장에 들어갔다. 내덕동에 청주방직은 목화솜에서 실을 뽑아 광목을 짜던 회사였다. 언니 둘은 일찍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내가 돈을 벌어야만 했다. 서른 살 되도록 성실하게 방직공장을 다니며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나는 출퇴근을 했지만, 타지출신 아가씨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우리는 줄지어 늘어선 커다란 방적기계 앞에서 솜먼지를 뒤집어쓰면서 일했다. 옷에는 언제나 흰 실밥이 묻어 있는 고단한 생활이었다. 공장 현장은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고, 대형 방적기들이 늘어선 작업장에는 소음과 솜먼지가 가득했다. 콧등까지 온통 솜먼지를 뒤집어쓴 우리들은 비 오듯 땀에 젖은 채 기계에 매달려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야간작업 때 기계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먼저 보는 사람이 꼬집어서 졸음을 깨워줬다. 무섭게 달려드는 잠을 깨지 않으면 실들이 엉켜서 기계가 멈출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 조는 친구를 꼬집어서 깨워 주는 게 우리의 의리였다. 고단했던 그 시절이지만 애틋하게 주고받던 마음 덕분에 초라하지 않았다. 조금만 일이 밀려 버리면 작업반장이 쫓아와서 호통을 쳤다. 월급날이 되면 가로수길을 지나 사거리 분식집으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라면 한 그릇과 단무지, 시금치, 당근만 달랑 들어있는 김밥을 시켜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그 시간만큼은 청춘으로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청주는 우리 같은 아가씨 수천 명이 일하는 공장들 덕분에 경제가 활발했다. 2교대로 일하면서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와 살림에 보태면 남는 돈은 거의 없었지만 뿌듯하고 감사했다. 그렇게 가장노릇 하느라 서른을 꽉 채우도록 열심히 일하고 살았다. 

#휘파람 세레나데로 알콩달콩 연애
19살 때 나는 처음에 운명처럼 서로에게 끌렸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한다. 그이는 같은 동네 친구의 친구인데 몇 명이 합석한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눈이 맞았다. 

자, 본격적으로 연애해보는 거야. 나는 밥을 한술 뜨는 척만 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채 외출 준비를 끝낸 뒤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밖에서 휙! 집 앞에서 그가 휘파람을 불면 뒷산에서 휘파람새가 더 높은 음으로 대꾸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그 소리가 정말로 새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나는 사랑하는 그이의 휘파람 소리와 새가 우는 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다. 싸리문 바깥으로 살짝 나가면 싸리나무 울타리 어둑한 끝에 큰 키를 기대고 서서 나를 기다리는 그이가 멋져 보였다. 

우리는 둘이보다 여럿이 청주 시내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었다. 그때 자장면 값은 20원이었다. 자장면과 함께 야끼만두를 한 접시 시키면 속이 꽉 찬 만두 맛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한껏 멋을 부린 그이는 나무젓가락을 손바닥으로 비벼서 쪼개는 것으로 우리의 사랑을 점쳤다.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누가 더 많이 연모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결혼한 뒤에 그곳의 중국집은 문을 닫았다. 후에 남편과 그때의 야끼만두 맛을 찾아 여러 곳의 중국 음식점을 가보았으나 그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편과 같이 가꾼 꽃밭은 풍요로왔지
지금의 남편은 중매로 만났다. 보은 시골로 시집와서 생각보다 농사일도 잘했고 동네에 일손이 모자랄 때 거들기도 좋아했다. 무엇보다 꽃을 가꾸는 일은 가장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다. 꽃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었던 남편도 차츰 꽃을 좋아하게 되어 보은 장에 나가는 날이면 꽃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새로운 종류의 꽃을 한두 가지씩 사서 집에 돌아왔다. 화단을 중심으로 안쪽 담장을 돌며 심어놓은 꽃들의 종류가 많아서 이른 봄부터 가을까지 활짝 핀 꽃을 항상 볼 수 있다. 이제는 혼자 꽃을 가꾸게 되었다. 재작년 가을에 삽목해서 키운 산수국이 요즘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자줏빛과 보랏빛의 나비들이 나풀거리듯이 피어있는 모습이 예쁘다. 딸들이 도시로 나와서 함께 살자고 해도 꽃을 가꾸는 재미가 커서 아직은 내키지 않는다. 

#세 딸은 꽃보다 더 환하고 예뻤다.
솔직히 그때는 서운했다. 딸만 셋을 낳고 밑으로 아들 하나만 더 있었으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돌아보면 딸 셋을 낳고 기른 것에 감사한 마음이다. 셋 중에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다 소중한 내 새끼들이다. 우리가 빚은 걸작품들이다. 나이가 들면서 서로 자주 만나고 재밌게 지내는 것 같아서 어미마음으로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동안 내 생일은 굳이 챙기지 않았었는데 내가 혼자 된 뒤로는 딸 셋이 매번 잊지 않고 챙겨 주고 있다. 셋이서 장도 같이 보고 음식도 만든다. 우애 있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 몇 해 전 큰딸이 하트 장식을 매단 닷 돈 순금 체인 목걸이를 선물했다. 고마운 마음에 사시사철 목에 징기고(걸고) 다닌다. 쑥떡에 콩가루를 묻히고 있던 딸이 다가오는 내 생일에는 금팔찌를 세트로 맞춰 주겠다고 한다. 딸아, 고맙긴 하다만 선물 그만해도 된다. 무탈하게 사는 모습이 선물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그래도 내 딸들이다. 나도 건강관리 잘 해서 니들 걱정 안 시키마. 우리 목화솜 틀듯이 매일 새날처럼 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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