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5월, 보은면 교사리의 그 봄은 지난했다. 야윈 연둣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내 나이 열 살이었다. 깊고도 긴 가난이 찬연한 봄빛을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것을 보았다. 보리누름 즈음이면 시골살이는 팍팍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세상은 시끄럽고 도시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십 년 전에는 인근 마을에 굶어죽는 이웃도 더러 있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들었다. 보리밭에는 문둥이가 수시로 나타나서 어린 아이들을 데려가 해코지를 한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어 두려움이 땀띠처럼 온 몸에 붙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보리타작과 비슷혀, 그놈의 까시래기 마냥
보리타작을 해야 그나마 꽁보리밥이라도 굶지 않고 먹던 시절이었다. 보리는 익을 무렵 고꾸라지기 십상이었다. 밀이나 벼들이 태풍을 만나지 않는 한 꼿꼿이 선 채 수확의 몸을 내 주는데 반해 보리는 대궁이 익으면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까시래기는 얼마나 따갑고 지독한지 보리를 베고 나면 온 몸이 고슴도치에 쏘인 듯이 따끔거리고 아팠다.
보리를 베어낸 뒤에 모내기 할 물을 받았다. 이것을 '무논 만들기'라 하는데 쟁기질로 보리뿌리를 뒤집어 엎고 저수지나 웅덩이의 물을 끌어내어 써레질로 평탄 작업을 하는 힘든 과정이 필요했다. 이 모든 일들은 남정네와 힘센 소의 몫이었고 아낙네들은 새참으로 보리 개떡을 굽거나 쑥털털이를 하거나 막걸리를 빚어 날랐다.
아이들은 엄마한테 지겨운 숙제를 받아 비료포대를 들고 보리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다가 개울로 달려갔다. 그 개울에는 올챙이며 비단개구리가 진을 치고 다슬기며 우렁이도 기어다녔다. 풀숲 가장자리엔 미꾸라지며 거머리도 이웃했다. 물봉선과 고마리가 꽃대를 밀어올리는 사이로 유월의 볕은 눈이 부셨다.
해거름이 되어야 아이들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6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었다. 맏이인 언니는 물도 이고 왔고, 아궁이에 불도 지폈고, 동생들 빨래를 하고, 몸을 씻겼다. 엄마를 도와 바느질도 곧잘 하고 이불 홑청을 입히고 인두로 다림질도 했다.
나는 동네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친구들은 찔레가지를 한 줌씩 꺾어 나와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껍질 속의 매끈한 가지에 서로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씩 돌렸다. 이렇게 나뭇가지 파마를 한 채 자고나면 아침엔 머릿결이 꼬불꼬불한 파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동동구리무 장사가 왔을 때 엄마가 사 놓은 가루분이라도 살짝 발라보고 싶었지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할 터. 언니는 새하얀 광목천에 목단을 수놓고 있겠지. 목단이 가득 피어오른 언니의 횟대보가 부러웠지만, 나는 수를 놓거나 바느질에 취미가 없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놀고, 밀을 베어 와서 구워먹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데 재미를 붙였다.
스물이 넘었을 때 이웃 마을 백씨 댁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선도 안 보고 부모님의 뜻을 좇아 시집을 왔다. 7남매의 맏이에 시부모님이 함께 사시는 집엔 돌쟁이 시동생이 있었다.
시집 온 다음해에 첫째 희순이가 태어났다. 원숭이띠로 올해 쉰셋이다. 둘째 희진이가 태어났어도 제대로 한 번 업어줄 수 없었다. 시동생이 먼저 내 등에 업혔고, 시부모님과 남편은 당연히 시동생을 먼저 돌봐 주리라 믿는 것 같았다.
막내 시동생을 업고 밥하고 빨래하고 맷돌을 돌려 두부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오뉴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셋째 창금이를 낳고 넷째 창성이를 낳았다.
세상에 부모보다 먼저 세상 떠나는 자식이 젤로 불효막심한데, 4년 전에 창금이가 떠났다. 가슴에 맷돌이 얹혔다. 수시로 그 맷돌이 돌아간다. 그래도 떠난 사람은 떠났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두고 간 남매를 며느리가 잘 돌보며 키우고 있다. 고맙기 그지없다.
?지난날이 서글프지 않아 때론 그리워, 늙었나봐
아이들 키우는 동안 도시락을 많이도 쌌다. 다섯 명의 학생이 날마다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렸다. 아침밥을 먹이고 도시락 다섯 개를 싸고 학교에 보냈다. 저녁이면 도시락을 씻고 내일 반찬을 장만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내 손에는 로션 한 번, 내 얼굴에는 동동구리무 한 번 바를 여유가 없었다. 사는게 뭔지. 이렇게 사는게 인생인지, 한숨 한 번 제대로 못 쉬고 세월이 유수같이 흘렀다.
시부모님은 15년 전에 돌아가셨다. 불같은 성격에 대나무같이 꼿꼿하고 꼬장꼬장한 영감님도 떠났다. 담배 농사지을 때 연속하여 3단씩 처리하던 솜씨며, 남의 논밭을 빌려 환하게 풀매고 논둑과 밭둑을 깎아내던 손재주는 모두 사라졌다.
제주도와 거제도로 여행을 다녀왔던가? 내가 바다를 보고 싶다고 그렇게 소원을 해도, 다음에... 이 다음에... 하더니 결국은 동네 아녀자들과 계를 모아서 다녀왔다.
비행기도 그 때 처음 탔다. 멀미가 났고 어지러워 구경을 하는지 몸살을 앓는지 모른 채 여기저기 다녔다. 그래도 가끔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집을 떠나 어딘가로 가는 일은 신나고 즐거운 일이다. 결국은 우리 집으로 돌아와 전깃불을 켜고, 이불을 깔고 밥상을 펴겠지만, 가끔은 좋은 세상을 맛보고 재미난 일을 하면서 살 일이다.
장아찌는 지겨워서 먹기 싫다. 아이들 도시락 싸 준다고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보기도 싫어했다. 그런데 노인학교 점심에 머위잎 장아찌가 나왔길래 꼭꼭 씹어봤더니 짭쪼롬한 그 맛이 제법이다.
정구지 김치도 싫었는데 차츰 입에 땡긴다. 내가 늙어서 그렇나? 늙었다는 증거가 맞나? 하긴, 나이가 들면 옛날 어렸을 때의 음식이 그립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 옛날 내가 열 살 때 우리 어머니가 해 주시던 보리 장떡이랑 쑥털털이를 맛보고 싶다. 된장만 한 술 버무려 장떡을 구웠고, 굵은 밀가루를 뿌려 쑥털털이를 했었다. 입에 넣을 때의 그 쑥향이, 된장 내음이 참 좋았었는데...
이제는 그 방법도 잊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십 년 전까지는 알았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가 보다. 그 속에 아름답고 좋은 추억만 아로새기겠지? 내가 열 살 때 걷던 논둑 밭둑과 젊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잔잔한 웃음을 채우겠지?
문득, 돌아가신지 오래된 까마득히 세월 흐린 내 부모님이 보고 싶다. 두 분은 저 세상에서 사위도 만나고 사돈도 만나서 좋으신지...
희미한 그림자에 가려진 뭉클한 지난날들이 서글프지 않고 때론 그립다.
늙었나봐.
김경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