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을 헤쳐갈 종교를 생각하며
재앙을 헤쳐갈 종교를 생각하며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6.25 08:47
  • 호수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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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경 진
마로 한중/한살림

하지가 나흘 전 지났는데 더위는 대서처럼 뜨겁다. 절기에 따른 작물의 순환도 조금씩 앞당겨진다.
탄소로 뒤덮여 있는 것이, 원래의 대기에 이불을 덮은 격이다. 북극은 매년 최고기온을 갱신한다. 동토의 땅 시베리아도 지금 섭씨 38도이다. 인간이 남기는 탄소발자국에는 많은 동식물의 멸종이 담겨져 있다.
모든 재앙을 불교에서는 삼재팔난이라고 부른다. 지금의 위기가 바로 삼재 아닌가 싶다. 삼재에는 큰 삼재와 작은 삼재가 있다고 한다. 큰 삼재는 물, 불, 바람이 일으키는 재앙을 말한다.
기후위기는 우선 홍수, 화재, 태풍을 더욱 키울 것이다. 인간이 일으키는 환경파괴와 자원고갈도 가속화되면서 서로 맞물린 연쇄작용이 훨씬 더 증폭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홍수, 화재, 태풍보다도 더 엄청난 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정말 큰일 아니겠는가?
작은 삼재는 질병, 전쟁, 기근을 말한다. 사실 작은 삼재가 아니다. 전체 사회와 개인에게 미치는 비극의 트라우마는 영원히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엔 자연재해라는 큰 삼재와 연관되어서 비롯되는 것이다.
파괴된 동식물의 서식지에서 나온 바이러스가 인간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에볼라도 메르스도 코로나도 모두 숲에서 나온 것들이다. 숲이 더욱 파괴되는 만큼 더 심각한 질병들이 출현을 대기하고 있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또한 지금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 식량위기를 대비하고 있다.
특히 주요 식량수출국들이 우선적으로 수출봉쇄를 시작하며 추세를 주시하고 있다. 배고픈 시절을 겪어본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또 북한의 굶주림을 지켜본 우리지만, 희안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식량위기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밥과 김치만 있으면 사는게 아니고 그것마저도 농업생산자원이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급농업과 자주적 식량안보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취약하다. 그동안 부족하면 손쉽게 수입해서 사먹어왔지만 만약 수입이 안된다면 바로 기근상태로 들어가는 것은 잠깐이다. 이를 경험한 북한만해도 농업생산에 사활을 걸지 않는가?
전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온다면 우선 자급농업이 안되는 나라부터 치명타가 온다. 그러면 단 한방으로도 인간세에 지옥도가 펼쳐진다. 마찬가지로 금융위기도 식량위기와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금융과잉으로 부동산 거품같은 투기자본이 만들어져있고 그 틈새는 저평가된 노동과 실물이 받쳐줘왔지만, 이제 이 고리가 깨지게 된다.
그러면 모든 돈과 밥의 갈등이 국가, 사회, 지역, 개인 간에 전쟁처럼 치닫게 될 것이다. 전쟁은 이념이라는 명분을 달고 돈과 밥으로 일으키는 가장 처참한 복합비극이다.
그럼 이런 위기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가? 나는 이 모든 위기의 본질이 구조-시스템 그 자체에 있다고 본다. 지금의 모든 문제는 지금의 구조에서 낳은 필연적인 결과로 본다. 본질을 놔두고 지엽적인 것으로 사안별 대응만 내세우면 악화일로만 남는다. 마치 병의 원인을 건드리지 못하는 대중요법과 같다.
그러므로 구조에서 비롯된 본질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아예 기존의 체제를 변화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이는 말 그대로 체제전복이지만 과거와 같은 폭력적인 혁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정치세력의 교체일뿐이라면 본질적으로 바뀌는 것이 없다.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데 낡은 방식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사람들의 동의와 공감을 얻으면서 근본적인 가치와 체제를 바꿀수 있을까?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 나오는 운부대사와 반계 유형원의 대사가 생각났다. '신민에는 교가 방편이다'라는 대목이다. 종교를 통해 의식변화를 일으키고 사회의 근간도 혁신시키는 것이다.
120여년 전에 유불도 삼교를 통합한 가르침으로 사회변혁을 추동했던 동학이 이 시대에 다시 새로워지는 길은 무엇일까? 지금은 그때와 오히려 반대로 엮어본다. 개개인에게 개별화된 나만의 동학을 가지고 자신만의 특수성을 일상에 접목시키고 이것으로 보편적인 시대정신으로 실현해 나가는 '자기조직화'의 방향성은 어떠할까? 모든 종교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교'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는 우리들이 살고있는 현 시대를 제대로 해석해주는 시대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들어 '왜 노력해도 나는 가난해야 하는가?'를 제대로 설명해주는 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결코 '일상성'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교리와 일상생활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앎과 실천은 한 몸이다. 안다는 것은 곧 실천하는 것이지 실천하지 못하는 앎은 진정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양명학의 '양지'와 같다. 일원화된 삶의 견지는 일상생활의 현실성을 매순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초능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바꿀수 없는 '교'는 힘을 상실한 종교이다. 더구나 지금은 몸보다 먼저 무너지는 취약해진 정신의 문제를 개개인마다 안고산다. 종교의 기적행위도 결국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방편이었다. 사람의 양심을 회복하는 것보다 더 큰 초능력은 없다. 양심은 모든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업이든 계획이든 사람이 하는 일에 정작 사람을 빼놓고 물건이나 일만 정해서 돌리려 한다면 그건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선순환되지 못하고 막힌다.
인간사 모든 재앙을 삼재팔난이라고 한다. 내 마음을 잘 살피고 일상을 잘 돌보고 세상을 잘 공부하다보면 어떤 재앙도 잘 헤쳐나갈수 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사람은 새 길을 걷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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