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역사 일궈가는 신발나라한일, 100년 가게 될까
70년 역사 일궈가는 신발나라한일, 100년 가게 될까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6.18 09:36
  • 호수 54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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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화 만드는 장인 한진동씨 대 이어 한두엽씨가 2대째 운영
보은 사람들의 발을 편안하게 신발 만들어주는 오래된 가게

수제화 만드는 직공이 10명 있을 정도로 번성
신발을 직접 만든다고? 고급 수제화는 서울 강남에서만 존재할 것 같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보은에는 한일양화점이 있었다. 오랜 세월 꾸준히 보은 사람들의 발을 지켜준 한일양화점의 신발들은 주민들에게 사랑받았다.  한창 잘 나갈 때는 직공이 10명 가량 됐었다. 현재는 구순이 훌쩍 넘은 창업자 한진동씨가 소가죽을 대전에서 사오면 직공 10명이 달라붙어 재단하여 미싱으로 신발을 뚝딱뚝딱 만드는 게 일이었다. 당시에는 없어서 못 팔았다. 신발이 부드러웠고 오래갔다. 한일양화점표 신발을 하나쯤 가져보는게 소원일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지금의 자리에 매장을 하기까지 아버지는 야외 리어카에 가리개를 하고만들어서 지금의 자리를 샀다. 그리고 일가를 이루었다. 여기서 배우고 나간 직공들이 연이어 털보양화점, 영신양화점, 대지양화점 등을 차렸다. 어찌보면 한일양화점은 보은 지역에 등장하고 사라졌던 모든 양화점의 뿌리였다. 영원할 것 같던 수제화 시장도 브랜드 기성품이 90년대 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위축되었다. 그 즈음에 아들 한두엽(62)씨가 아버지의 가업을 잇겠다고 들어왔다. 5남1녀 중 셋째였다. 수제화 만드는 것을 곁눈질로 배워 익혔지만, 수제화시장이 축소되면서 별로 써먹을 일이 없었다. 다만, 신발에 대한 기본철학과 정신은 오롯이 배웠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우선 신었을 때 편안해야 한다는 기본 철학으로 함부로 신발을 들여오지 않았다.  수제화를 만들었던 매장이라 다르긴 다르다는 평가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재고가 남으면 고스란히 부담으로 떠안아야 겠기에 몇 번이고 먼저 신어보고 편안한 신발로 골라 사왔다. 고객들이 원하는 신발을 척척 내오면서 한번 신어보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거기서 나왔다. 그가 들어오면서 수제화 매장은 기성품 매장으로 수공예 작업은 이제 유통으로 변이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름은 고치고 싶지 않았다. '한일'이란 오랫동안 지켜온 브랜드는 그대로 두고, 양화점 대신 '신발나라'를 붙였다.

보은사람들의 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70년 역사의 신발나라한일.
보은사람들의 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70년 역사의 신발나라한일.
2대째 신발가게를 운영중인 한두엽씨와 손자.
2대째 신발가게를 운영중인 한두엽씨와 손자.

임업원예 전공으로 공무원도 했지만, 그만두고 가업 이어받아
한두엽씨는 동광초등학교와 보은중학교, 보은자영고를 졸업하고, 대전 중경공전에서 임업원예학과를 졸업했다. 원예전문기사도 하면서 농촌지도소에 1년 다녔다. 지금은 각광받는 공무원 신분이지만, 당시만해도 월 20-25만원의 급여로 박했다. 버스비니 밥값이니 지불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만뒀다. 그리고 87년에 결혼을 하고, 가업을 잇기 위해 들어왔다. 변화를 꾀해야 했다. 이제 수제화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금강 레스모아 대리점을 시작했다. 금강구두 대리점을 시작하려 했지만, 지역이 작다고 대리점을 내어주지 않았고 그보다 한단계 낮은 레스모아 매장을 열었던 것. 당시 엘칸토에서는 베가본드란 브랜드를 출시했고, 금강에서는 레스모아란 브랜드를 출시했었다. 레스모아 브랜드를 내걸고 금강구두를 판매하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 브랜드 없는 신발도 서울 동대문 시장에 가서 사왔다. 물건이 안 나가면 재고가 고스란히 남기 때문에 시대의 트렌드를 읽으면서 편안한 신발을 구매해야 했다. 보은 사람들의 신발 취향을 잘 파악해야 했다. 타이야표 고무신은 아직도 인기가 많다. 검정고무신, 파란 고무신, 흰고무신 세 종류가 나오는데 아직 어르신들은 여름이면 고무신을 신는다. 기차표, 말표 브랜드도 여전하다. 청소년, 청년들은 인터넷으로 구매하거나 대전에서 사는 것이 일상화되었지만, 50-60대 이상은 아직 한일 신발나라를 꾸준히 찾는다. 메이커, 브랜드를 잘 모르는 유아들도 부모 손에 이끌려 신발나라를 자주 찾는다. 신발나라는 보은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매장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어떤 치수의 신발과 어떤 취향의 신발을 신는지 꿰뚫고 있다. 마치 주치의처럼 원하는 신발 처방을 착착 해주는 것이다.

새벽에는 사과농사 짓고 낮에는 신발가게 운영 눈코뜰새 없어
아침 9시에 열어 저녁 9시에 문을 닫는다.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서 보은읍 교사리와 성주리에 있는 사과밭 2천평 700주를 가꾸는데 2-3시간을 오롯이 쓴다. 별로 쉴 틈이 없다. 그는 신발가게에 앉아 있는 것이 쉬는 것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취미로 테니스를 좀 쳤었다. 보은군 테니스협회장도 하고 그랬는데 테니스 엘보가 오는 바람에 팔이 아파서 요즘엔 못친다.  새벽 나절 농사일하고 신발가게 보는 게 유일한 낙이다. 쉬는 날도 거의 없다. 집이 바로 3층이라 출퇴근이랄 것도 없다. 보은 사람들의 발을 지켜주는 것. 이 일을 아버지 대를 이어 70년 가량 하고 있는 것이다. 슬하에 1남1녀를 두었지만, 아들은 서울에서 직장 다니고 딸은 결혼해 보은에 산다. 요즘엔 손주 보는 재미도 있다. 신발가게는 자식들에게 굳이 물려줄 생각이 없다. 하지만, 신발가게 문을 닫는 날까지 충실하게 가업을 잇고 싶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새 수시로 사람이 들락날락한다. 어떤 여성고객은 편한 신발 달라고 하니까 치수도 정확히 알아 몇 켤레를 가져다 준다. 몇 개를 신어보더니 단박에 구매해 가져간다. 어린 아이 손을 붙들고 온 아이 엄마도 신발을 사 갔고 할머니도 신발을 구매해갔다. 어떤 농민은 울트라표 긴 장화를 구매해가기도 했다. 신발이 편해야 많이 걸어다니고 오래 일할 수 있다. 신발이 불편하면 사실 일상이 무너진다.
"요즘 추세는 디자인을 굉장히 중하게 여기지만, 사실 신어보고 편해야 오래신고, 땀 같은 것을 흡수하려면 가죽 제품이 좋거든요. 그런데 그걸 잘 몰라요. 저도 신발 만드는 것을 직접 봐왔고 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은 좋은 신발을 고르는 안목을 주신 것 같아요. 그 덕에 신발가게를 여지껏 하고 있는 거죠."
그냥 신발매장이 아니었다. 장인 정신을 이어받은 한두엽씨가 고르고 골라 최상품만 가져다 놓은 신발매장이었다. 보은 사람들이 원하는 취향을 파악하고 그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놓은 매장이었다. 70년 역사가 괜한 역사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보은 신발가게 역사의 신기록을 매해 갱신중이었다.
100년까지 이어져 백년가게가 되기를 바래본다.
문의 : ☎043-544-2233
주소 : 보은읍 삼산로 36
황민호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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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2021-02-09 17:19:29
일본에서 100년 이상 운영하는 가게나 기업을 老舖(しにせ 시니세)라고 합니다. 일본의 老舖는 3만여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1000년을 넘은 곳도 9곳입니다.
중국에서는 老字号[lǎozìhào 라오즈하오]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老字号는 1만여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은 30년 이상 운영하는 가게도 많지 않은 편입니다. 70년 역사를 가진 가게는 정말 대단합니다. 앞으로 100년 1000년 이상 명맥을 이어가기를 바랍니다.
좋은 기사입니다.

한현대 2020-06-20 22:44:24
사과 농사까지 하시고 존경스럽습니다!! 100년까지 역사가 이어질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