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하여 복덕이는 복덩이
그리하여 복덕이는 복덩이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6.18 09:26
  • 호수 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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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사람, 김복덕 어르신 (1943~)

스무 살 쯤 됐을까. 양푼에 밀가루 반죽을 담아 치대다 말고 고개를 들어보니 앞집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제법 높아 보이는 담벼락의 양옆을 손끝으로 잡고 반쯤만 내놓은 얼굴인데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나는 외면하려 했지만 무심코 눈이 마주쳤다. 손끝 야무진 내가 시어머니 마음을 사로잡았던 첫날이었다.

좋은 사람들 덕분에 불우하지 않았다
4남매 중의 셋째로 속리산면 삼가2구에서 태어난 나는 여덟 살이 되자마자 동네 사람의 먼 친척 집으로 보내졌다. 아이 둘을 키우며 큰 점빵을 운영하고 있던 집이었다. 궁색한 살림에 입하나라도 덜고자 엄마가 나를 서울로 보낸 것이다. 엄마 품이 그리운 나이, 한동안은 밤마다 베갯잇을 흠뻑 적셨다. 고사리 손으로 집안 청소도 하고 가게 일을 도우며 지냈다. 밥도 잘하고 가게일도 익숙해 질 즈음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2년만이었다. 내가 내려오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집에 도둑이 들어, 가게 안의 물건을 몽땅 다 가져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동네 분은 그 집이 나를 가게에 계속 앉혀두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엄마에게 말했다. 잠시 집에 있다가 다시 남의 집 살이를 갔다. 이번에는 대전에서 살고 있는 군인 장교 아저씨네 집이었는데 애기 볼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가 그 집에 갔을 당시에는 애가 한 명이었는데 그 아래로 둘을 더 낳았고 그 아이들을 내가 거의 키우다시피 했다. 나를 큰딸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는 점잖은 분들이었다. 내가 그 집 아이들을 키웠고 그분들은 나를 키운 셈이다. 언제나 나를 복덩이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대해줬다. 아저씨가 대전 논산 부산등으로 발령이 날 때 마다 나도 따라서 이사를 했다. 이사를 갈 때마다 졸병들이 깨끗하게 관사를 청소해 주었고 이삿짐도 내가 거들 새도 없이 군인 여러 명이 일사천리로 정리해 주었다. 곤궁해서 남의 집 살이 했지만 인복이 있어서 불우하지 않았다.

실례지만 누구세요?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 가족과 함께 살면서 엄마의 바람대로 잘 먹고 잘 입고 살았지만 고향이 그립고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한 끼 먹더라도 식구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고 싶었다. 가족이 보고 싶어서 시골집에 다녀오겠다고 하니 아주머니가 광목을 한 통 터주며 그것으로 엄마에게 예쁜 옷을 한 벌 해서 드리라고 했다. 그때 당시 광목이 시골에서는 흔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다. 부모님 드릴 돈 봉투도 따로 챙겨 주셨다. 아주머니의 마음씀씀이에 속울음만 훔치며 그 집을 나섰다. 부산에서 단양까지 혼자서 긴다리 집을 찾아왔는데 식구들이 이사를 가고 없었다. 옆집 아저씨가 이사 간 집을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오심집을 찾을 수 있었다. 엄마 아버지 식구들 다 함께 살고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마당에 매어놓은 줄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엄마! 엄마! 두 번을 부르니까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뉘신지는 몰라도 우리 딸은 객지에 나가서 안들어 오고 있다우"
라고 말씀하셨다. 여덟 살부터 가족과 떨어져서 살다가 십 년 만에 나타났으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해는 되었지만 복받치는 서러움을 참을 수 없어 통곡을 하고 말았다. 뒤늦게 나를 알아보신 엄마는 오히려 나를 나무라시며
"아이구 복덕아 아구 이것아 어디에 있는지 안부는 보냈어야지 무심한 거 같으니"
엄마도 애가 닳아 하신 말씀이다. 식구들과 며칠 꼭 붙어 지내다 다시 군인 아저씨 관사가 있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아저씨한테는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나를 마음에 들어 해서 틈만 나면 자기 집에 데려가고 싶어 했다. 여동생은 구미에서 박스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하는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나는 사람을 구할 때까지만 집안일을 도와주기로 하고 그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 후 한 달이 지났을까? 아버지가 나를 데리러 오셨다. 부산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은 없었다. 그 길이 마지막이었다. 집을 떠나와서도 한 번씩 그분들이 생각이 났다. 요즈음엔 자려고 누우면 그분들이 더욱 보고 싶어진다. 이름도 얼굴도 무수한 세월 속에 묻히지도 않았다. 고마운 이들! 강영학 아저씨 김숙희 아줌마. 첫째 강시애 부터 강태수 그리고 강지애, 이 세 명의 아이들이 보고 싶다. 다들 환갑이 넘어갔을 테지만 내 머리에는 여전히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으로 떠오른다. 

매파는 칼국수
보은 집에 돌아와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장을 보고 오다가 삼거리에 있는 친척 아주머니네 집에 들르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오빠라고 불렀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칼국수를 해 주신다면서 밀가루를 꺼내시길래 나는 얼른 양푼을 받아들고 내가 하겠으니 두 분은 말씀을 나누시라고 했다. 나는 밀가루를 손에 착착 붙게 반죽을 한 뒤에 밀대로 밀어 칼국수를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도시에서 살다온 젊은 아가씨의 솜씨에 다들 칭찬 한마디씩 얹어주었다. 앞집에 살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우리가 집에 돌아가기 위해 대문을 나서자마자 아주머니 댁에 오셔서 솜씨가 좋은 아가씨 같으니 당신 아들과 중신을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단다. 그 앞집 아주머니가 바로 시어머니자리였다. 신랑감은 군에 복무 중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어른들끼리 우리의 결혼을 결정했다. 여름에 신랑이 하루 휴가를 나와서 삼거리에서 약혼사진 한 장을 찍고 돌아갔다. 터미널까지 함께 걸었는데 차에 올라타서도 신랑감은 쑥스러워서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살짝 신랑감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이도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애였다.

생글생글 웃는 할미로 기억될테야
다음 해 삼월에 신랑이 제대하고 돌아와서 첫아이를 바로 갖게 되었고 그 뒤로 다섯을 더 낳아 육남매를 키웠다. 큰딸을 낳았을 때 시부모님이 논 세 마지기와 밭 한때기를 떼어 시댁 근처에 살림을 내어 주셨다. 돌아보면 시부모님께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말들을 짓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울컥해지는 시어머님의 말씀이 있다. 시어머님이 소막에서 여물을 주고 있던 남편에게
"새아기하고 말다툼을 자주 하거나 혹 손찌검이라도 할 거면 네가 끼고 있지 말고 젊을 때 빨리 돌려 보내거라. 저만한 아이면 우리 집보다 더 좋은데 가서 대우받고 살거니까, 이 나이 될 때 까지 자이(저 아이) 같이 뭐든지 잘하는 애를 본적이 없다."
방에서 큰애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데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꾸중을 들어본 적이 없고 시댁 식구 누구에게도 서운한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시어머니는 바다처럼 다 담아주신 분이었다. 나도 그 마음에 보답하고자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다. 
시어머님 속치마를 이틀 만에 완성해서 드렸더니 이런 것 다 하려면 잠은 언제 자냐고 걱정을 하셨다. 나는 손이 빨라서 양말이나 장갑 같은 것은 집안일을 다하고도 하루 만에 끝냈다. 나는 시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두 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았다. 작년에 남편마저 떠나고 이제 나 혼자 남았다.
내가 흙사랑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안다면 누구보다 기뻐했을 사람이다. 살아온 날들에 감사하고 앞으로의 삶에 더 큰 바람도 없다. 남은 날들도 생글생글 웃는 귀여운 할미로, 복덩이로 살고 싶다면 욕심일까?
김경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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