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은 아이를 잘 키우는 보드라운 금손
내 손은 아이를 잘 키우는 보드라운 금손
  • 김경순
  • 승인 2020.06.11 09:38
  • 호수 5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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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교사리 이옥순 어르신 (1942~)

'은빛자서전 인생은 아름다워'는 지역어르신들과 함께 어르신 자서전을 기획합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개인의 생애사가 더이상 개인의 것이 아닌 공통의 역사가 되기도 합니다.  지역 어르신들과 살아온 이야기를 잘 귀담아 듣고 미래를 보는 혜안을 키우고자 합니다.
많이 애독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생을 다 살아보면 세상이 공평하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다.
부모님 일찍 여읜 어르신 인생에 손자들 11명이 찾아왔다.
부모 없이 자란 설움을 피붙이들에게 열 배의 사랑으로 되갚으셨다.
주름 하나하나가 손자 손녀가 만든 나이테처럼 결이 곱다.

술하에 2남4녀의 자식을 두고 친손, 외손해서 11명이 손주를 둔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이옥순 여사님. 부모를 일찍 여의고 남편을 먼저 보냈지만 자식복 덕분에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계신다.

일찍 알아버린 부모 없는 설움
내 고향은 보은군 내속리면 백현리이다.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서 땅뙈기 쪼금 가지고 농사짓는 부모님 아래에서 식구들이 간신히 밥은 먹고 살았다. 내가 8살 때 지금 코로나 19처럼 당시에 돌고 있던 염병에 걸리셔서 정월과 삼월에 순서대로 돌아가셔서 부모 없는 설움이 시작되었다. 큰언니는 시집을 가서 멀리 살았고, 큰오빠는 의용군에 징집되어서 소식이 없더니 끝내 생사를 몰랐다. 집에 남아있던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가 돈 벌러 연이어 객지로 나갔다. 덩그마니 혼자 남게 된 나는 사촌 올케와 같이 살았다. 사촌 올케 둘이 있었는데 두 집에 번갈아 살면서 조카들을 돌봐주며 밥을 얻어먹었다. 보은으로 시집간 언니는 나를 돌볼 여력이 없어서 친정 식구의 따뜻한 품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볼품없이 시작된 시집살이
나중에 객지에 나갔던 오빠들이 차례로 돌아와 장재 대궐터에서 잠시 함께 살았다. 19살에 이웃 할머니가 임한리에 사는 25살 김재구 총각을 중매해서 결혼했다.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하였던 결혼이었다. 둘째 오빠가 그 총각 네 사는 형편이 어떤가 몰래 가보았더니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왱기(왕겨)가마니를 묶어서 쌓아놓고 나락있는 것을 자랑하려고 했던 계략이었다. 쌀가마니가 아니라 딩게가마니 이더라 하고 내게 알려줬다. 이미 혼삿말이 오갔기에 도로 물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 중신애비들은 그짓말쟁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집 마당에서 혼례를 치룬 그날 하룻밤 묵지도 않고 당일로 트럭타고 시댁으로 갔다. 외동아들인 남편은 여동생 한 명만 있는데 손이 귀한 집이었다. 조촐한 세 칸 초가집에 시부모님이 방 한 칸, 시누이가 한 칸 쓰고 우리도 한 칸에서 단출하게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한량 이던 남편, 나를 억척같이 살게 했다.
남편이 글쎄, 성격이 구순하고 맘은 착한데 낮에도 놀고, 밤에도 바깥으로 나댕기며 놀고 좌우지간 노는데 선수였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당신 아들이 쌀이나 고추를 가지고 나가서 술로 바꾸어 먹었다고 내게 말해주셨다. 생활력이 없다니 어쩐다지? 할 수 없지. 내가 나서야지. 외동아들이라 오냐오냐 키워서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거다. 예컨대 내가 모 심구면(심으면) 이웃집 내외가 와서 도와주니, 우리도 가줘야 하는데 남편이 안 가서 나 혼자 가서 일했다. 그 정도로 남편은 일머리가 없고 안 하다 보니 일을 세게 못했다.

한량 남편과 사이는 그저 그랬는데 아들 딸 딸 딸 딸 아들 순서로 6남매나 낳았네. 하하하. 내가 두 발 벗고 나서서 나락도 베고 모도 심고 차츰차츰 남의 일도 다니고, 찬 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장예 쌀도 얻어먹고 돈도 빌려 쓰곤 했는데 이웃에서 애들 먹여 살리며 가르치라고 논을 1천평 빌려줘서 반반 나눠 먹었다. 6남매 다 고등학교 이상 가르쳤고 네 딸들은 제 앞길을 스스로 닦았다. 두 아들도 아버지와 다르게 부지런하니 감사하고 대견할 따름이다.

나한테 아이 복이 있구만
30년 전에 남편이 길을 건너다가 승용차 사고로 청주병원에 실려 가서 바로 돌아가셨다. 장안면 불목리에 있는 시댁 선산에 묻었다. 그때 마음이 슬프고 배신감도 들었지만 일찍 떠난 남편이 좋은 세상을 못 보니 여하튼 먼저 간 이가 그저 측은했다. 남에게 돈 빌리기보다는 술 받아주고 살아서 인심은 잃지 않고 가셔서 저승 가는 길은 속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내가 글을 알았더라면 내 마음 한 구석에 꾹꾹 눌러두었던 슬픔과 아픔과 기쁨 아름다움 행복 등 내가 겪어 온 모든 것들을 기록하면서 남겨 두었을 것을...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기억은 희미해지고 서운함과 슬픔은 콩알만큼 그저 조금만 남아있다. 그것도 센 입김으로 불면 휙 날아가 버릴 것이다. 이제 노여움도 없다는 거다.

나는 11명의 손주를 계속해서 키웠다. 아이 복은 있었다. 큰 손녀가 31살, 막내 손녀가 지금 18살이 되었다. 손주들이 어린이집에 가는 나이가 되자 심심하고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 '보은사람들' 신문사에 다니고 있는 막내딸이 '심심하면 흙사랑학교나 다니셔' 하고 넌지시 권했다. 큰아들과 살고 있는데, 교사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걸리니 운동 삼아 학교에 다니기 수월해서 빠지지 않고 다닌다. 흙사랑학교는 내가 임한리 살다가 남편 보내고 애들이 촌에 있지 말고 살던 집 팔고 돈 보태서 보은에 집을 사서 나오면서 다니게 되었다.

아이고, 공부는 어렵지만 만남은 즐거워
나는 자그마치 5년 째 다니는 장기 학생이라네. 그냥 아무 것도 모른 채 살 수도 있었지만 이제 나는 학생으로 살고 있지. 5년째 학생이고 여전히 학생인데 책 읽는 것은 그냥 읽을 수 있는데 쓰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렵냐고요!!! 그냥 받침 다 빼 먹고 선생님이 지적할 때마다 한글은 어렵다는 것을 또 깨닫는다네. 그 옛날엔 여자들을 가르치지 않았고 형편도 어려우니 공부할 생각은 꿈에도 못 해보고 살았지. 나이 들어 공부하니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또 잊어버려. 그래도 이제는 전화번호도 척척 누를 수 있고, 길가에 지나가다가도 상점 간판에 쓰여진 이름은 전부 다 읽을 수 있어서 산책길이 즐겁기만 하지. 한글 공부 복습하는 거니 꿩 먹고 알 먹고라지. 하하하, 소경이 눈 뜬 거 같아.

집에서도 공부하냐고? 집에서 시간 있을 땐 들여다보긴 하지. 애들 공부하는 것처럼 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냥 재미로 다닌다. 바쁠 때나 농사짓는 때는 못 나온다. 쉬는 시간에 20명 정도 되는 학급 동무들과 웃고 떠드는 시간이 제일 재미있다. 자식 자랑도 손주 자랑도 이때 한번 슬쩍 끼워 넣기도 하지.

지금이 제일 행복하고 나답게 사는 것 같다
이제 내가 나의 인생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을 단 한 단어만 말하라면 나는 감사라고 적으리라. 어려웠을 때도 행복했고, 배 아파 낳은 많은 자식들이 내게 가져다 준 살가운 기쁨들을 하나하나 적으면서 '나 이옥순은 여전히 행복하고 여전히 학생이다' 라고 적어놓으리라.
안녕. 나의 손주들아.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하나도 없단다. 할머니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었던 그 때도 기억해주려무나. 사랑한다.
김경희 시민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올해 어버이날 이옥순 여사님은 자식들과 사위, 손자, 손녀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전달한 상장을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다.
올해 어버이날 이옥순 여사님은 자식들과 사위, 손자, 손녀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전달한 상장을 훈장처럼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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