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가게] 반세기 운영한 오비식당, 변함없는 '맛'과 정취
[오래된 가게] 반세기 운영한 오비식당, 변함없는 '맛'과 정취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5.21 10:30
  • 호수 5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테이블은 달랑 세개지만, 전통의 깊은 맛 느끼러 줄 이어
일흔다섯살 오춘재씨의 식당 인생 48년에 보은이 녹아들었다
식당을 운영한지 48년째 되는 오춘재씨가 가게문을 열고 있다.
식당을 운영한지 48년째 되는 오춘재씨가 가게문을 열고 있다.

허름하다.
옛날 간판, 경계가 모호한 일자식 부엌 앞에 테이블 세개가 놓여 있다. 다리도 성치 않아 앉아서 일어서려면 한참 걸려야 하는 불편한 몸이지만, 그래도 생업을 꾸준히 이어간다는 것이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건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밥을 해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 일이다. 오랜 단골손님이 있다는 것은 두터워진 관계의 기억 속에 자존감을 높여주는 일이다. 무릎연골이 다 나가고 허리까지 아픈 성치않은 몸으로 하루하루 식당을 여는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시절 어릴 적엔 누구나 그러했듯이 불우했다. 어머니는 두 딸을 남겨놓고 서둘러 돌아가셨다. 보은읍 이평리에서 태어나 삼산국민학교를 다니다가 졸업도 못하고 그만뒀다.
서울 가면 일자리가 있다고 해서 14살 어린 나이에 상경했다.

밥만 먹여주고 기거하는 식모살이부터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부채공장이 그를 잡아먹을 듯이 기다리고 있었고 뒤이어 단추공장까지 정말 쉴새 없이 일을 했다. 군인들 옷에 단추를 다는 일이었는데 전깃불도 없이 작업을 하다가 기계에 찍혀 왼손 검지 상처가 아직도 남아있다.
상경한 해가 1960년이었는데 4.19혁명을 눈앞에서 봤다. 엄청난 기개로 학생과 주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자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것을 목도했다.

보은 식당계의 전설 오춘재씨.
보은 식당계의 전설 오춘재씨.

힘들었다. 힘들 때마다 생각났던 건 고향이었다. 내려가자. 결심하고 나섰을 때는 마음이 더 홀가분해졌다. 내려와서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신랑은 돈도 안 벌어주고 백수 생활을 오래했다. 살림은 곤궁한데 방법이 없었다. 내가 나서는 수 밖에.
그래서 식당을 차렸다. 내 나이 27살에 조그만하게 운전수들 주차장 옆에서 밥해주는 기사식당을 했다. 차 식구들이라고 했다. 그 때 식당 이름이 돼지 식당이었는데 운전사, 조수, 안내양 등이 와서 밥을 많이 먹었다. 식당은 한 곳에서 오래하지 못했고 부침이 있었다.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 하다가 재래시장 안에 정착했다. 상호를 뭐로 할까 하다가 오비맥주도 있고 해서 부르기 좋게 오비식당이라고 했다. 뭐 다른 뜻은 없다. 어떤 이는 내 이름이 오춘재(75)라는 것을 알고, 오씨니까 오비식당이라 한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렇게 지은 것은 아니었다.
자그마치 48년이다. 보은 사람들 밥 해준 경력만 해도 반세기에 가깝다. 쟁반위에 백반 배달하려고 머리에 이고 행여나 쏟아질까 아슬아슬 장터를 누빈 적도 많았다.
시간이 지났어도 변한 건 없었다. 사람도 써보고 80평짜리 알프스 식당도 운영해 봤는데 다 덧 없더라. 음식에 신경쓰는 것 보다 사람과 운영 관리에 신경 쓰는 것이 싫어서 하다가 말았다. 지금은 나 혼자 한다. 단촐하기 이를데 없지만, 행복하다. 내 밥벌이 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오춘재씨가 준비한 6천원 백반.
오춘재씨가 준비한 6천원 백반.

#6천원짜리 된장 백반이 끝내주는 집

이 집 된장, 청국장 백반은 정평이 나 있다. 알아준다. 허름한 집이라 아는 사람만 알고 찾아온다. 단돈 6천원에 무려 반찬이 취나물, 미역줄거리, 느타리버섯, 마늘쫑, 미나리, 멸치조림, 간장게장, 코다리, 조기, 고등어까지 15~17가지이니 제철 나물 반찬부터 정성이 깃든 밑반찬까지 옛날 할머니가 차려준 그 밥상 그대로를 선물받는다.
김치찌게나 동태찌게, 닭도리탕 등은 미리 예약하면 좋다. 백반이야 미리 해놓은 반찬 재빠르게 꺼내면 되지만, 다른 메뉴들은 별도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혼자 하려면 감프다.
식당 크게 할 때 2004년인가 2005년인가 보은 출신 태진아가 '스타 고향 나들이'라고 연예인 정형돈이니 조혜련이니 잔뜩 데리고 왔는데 다녀간 후 더 힘들었다. 사람이 밀려드는 데 감당할 수가 없더라.
사람들 많이 오는 거 반갑지 않다. 그냥 소소하게 내가 감당할 만한 손님만 오고 그들을 위해 밥을 해주는 것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하다.
"내 생활반경이 식당에서 100미터도 안 돼. 그 안에 내 삶이 다 들어있지요. 재래시장이 바로 붙어 있으니 식재료 배달 다 해주지, 하니까 식당 안을 떠날 일이 별로 없어요. 보은에 어디 도로가 나고 새 건물이 생겨도 한참 후에 병원 갈 때나 알지. 잘 모른다니까. 식당 옆에 빈 공간에서 먹고 자고, 테이블 부족하다 싶으면 내 방도 내어줘야지 별 수 있나. 그냥 그러고 살아요. 몸이 좀 불편해서 그렇지 세상 이렇게 편하게 산 적도 없어. 손님들이 내 몸 불편한 것을 아니까 쟁반도 들어주고 그래요. 그런 오고가는 정속에서 식당 운영하는 게 재미나지"
이전에는 직접 메주도 만들고 된장도 하고 했었다. 하지만, 힘에 부치고 공간도 없어 이제 공주에서 아는 지인을 통해 집된장을 공수해 온다. 토담골 시골된장 맛이 먹어보니 괜찮아서 계속 파는데 사람들은 그 된장국 때문에 식당을 찾는다고.
그렇게 4남매를 키웠다.

#신선한 농산물로 정성한가득

식당은 허름해도 재료는 최상급이다.
"이래뵈도 최고 좋은 농산물 가져다 쓰고 제철 농산물로 신선한 반찬 해주려고 노력해요. 새벽 6시면 벌떡 일어나서 아침 준비부터 하지요. 아침은 많이 먹는 사람이 없고 점심, 저녁 장사하면 문을 닫아요. 놀면 뭐해요. 저는 반찬하고 사는게 재미나고 행복해요. 사람 많아야 요란스럽기만 하지. 지금 나이에 때돈 벌 것도 아니고 입에 풀칠할 정도만 오면 되지. 손님들이 그랴 '아이고 이제 이 아줌마도 늙었네' 하면서 와요. 아까도 절뚝거리니까 얼른 들고가면서 '아줌마 건강해야 우리가 밥을 먹으러 오지' 하고 그래요. 그 말이 그래 고마울 수가 없어요."
달래를 넣어서 된장을 끓이면 그렇게 맛있다고 냉장고에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달래 뭉치를 보여 준다. 같이 정든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해 주방 도구들도 켜켜이 쌓아놓아 올려놓았다. 살아있는 역사이다. 멸치 볶을 때 쓰던 얇은 쇠주걱은 30년 넘게 할머니와 같이 한다. "이게 멸치 볶을 때 얼마나 유용한지 몰라. 그래서 이건 아직도 써요. 반들반들하고 이쁘지. 내 보물이지."
"죽을 때까지 하려고. 이렇게 찾아와주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얼매나 고마워. 오비식당 맛 변치 않을 테니까 맛 보고 싶은 사람, 기억하는 사람 천천히 발걸음 하셔. 난 늘 여기 있을 테니께. 너무 많이들 오지는 말어. 감당할만큼만."
삶은 녹록하지 않았지만, 또 버틸만큼 감당할만큼의 시련이 있었고 그렇게 단단해졌다고 오비식당은 말하고 있었다.
구수한 된장국이 그리워질 때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밥상이 생각날 때면 주저말고 오비식당에 가자.
황민호 minho@okinews.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