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1일 동학혁명 기념일에 즈음하여
■ 5월 11일 동학혁명 기념일에 즈음하여
  • 송진선 기자
  • 승인 2020.05.14 09:48
  • 호수 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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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순례길 수철령, 생명의 길을 걷다
순리를 역행하지 않고 순응하는 아름다움 오롯이 느껴

1894년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동학군들이 북실전투에서 최후를 맞은 가운데 생존자들의 퇴로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인 북실 수철령을 넘어 속리산면 북암으로 숨어들었다.
휴~ 다음을 모색할 수 있을까 모의하기도 전에 뒤쫓아온 일본군들에 의해 북암 동네는 탈탈 털리고 샅샅이 뒤지는 수색에 의해 마을 주민들에 의해 보호받던 동학군 7명이 처참히 죽임을 당해 버렸다. 얼마나 피비린내가 났을까?
몰살당한 동학군들의 시체는 북암리 부내실 주민들에 의해 이 마을 이병골(유병골, 의병골)에 집단매장됐다.
5월 11일 동학혁명기념일에 즈음한 지난 5월 2일 동학혁명북접사업회(회장 손윤)가 동학 순례길 수철령 생명의 길을 걸었다.
잔뜩 물기오른 생명의 싹들이 펼치는 경이로운 녹음을 감상했다.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수철령에서 죽음이 엄습해오는 막다른 길로 퇴각하는 동학군들의 마지막 발자국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듯했다.

종곡저수지~수철령~북암 무수목~부내실 이병골
동학군이 최후를 맞은 북실 대지를 촉촉이 적실 생명수를 가득담은 종곡저수지가 넉넉함으로 동학순례길 도보꾼들을 맞았다. 굽이굽이 저수지 주변으로 나있는 농로길은 126년 전 퇴각하는 동학군들이 넘었던 수철령을 찾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샛길을 따라 들어간 산속은 녹음방초, 싱그러움을 즐기기에 충분했다.
학살당한 동학군의 핏빛처럼 산야를 물들인 진홍빛의 진달래꽃이 진 자리에는 하얀색과 연한 분홍색이 절묘하게 퍼져있는 철쭉이 동학 순례자들을 맞는다.
꽃잎이 막 떨어져 지천에 깔려 있는가하면 조금 더 그늘진 곳에 있는 나무에서는 활짝 핀 꽃잎이 형광빛을 발해 산그늘 속을 환하게 비췄다. 산 속에서도 그늘사이를 삐집고 들어오는 햇빛의 양에 따라 조금 일찍 생을 마감하거나 아직 생을 이어가고 있었다.
순리를 역행하지 않고 순응하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이 오롯이 전해졌다.
산비탈을 이루고 산을 하나 넘는 코스이긴 하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급경사, 급하강하는 구간이 아니어서 걷기에 무난한 코스였다.
해발 539.5m, 높지 않은 수철령 정상을 넘어가 속리산면 북암리 무수목이라 불리기도 한 터골로 하산해 북암진료소가 있는 세강터(시강터) 마을을 지나 그리고 세강교를 건너 북암2리인 부내실 이병골에 닿았다.
동학군의 퇴로를 밟아보는 무거운 주제의 순례길 탐방이었지만 걸음 내내 이름모를 야생화도 탐색하고 멧돼지가 한바탕 진흙 목욕을 하느라 만들어놓은 구덩이도 살펴보고, 무당개구리 이면도 보면서 여느 트레킹 코스와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례를 마쳤다.
구한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생과사를 넘나들던 동학군들이 북실에서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을 넘어 생명의 땅을 찾아온 북암리는 6·25 한국전쟁 때도 생명을 품었던 곳이다.
1·4후퇴때 북한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와 북암리 무수목 터골에 터전을 잡고 화전을 일궈 생활했다. 지금은 집터와 화전이었을 것 같은 느낌만 있다.
화전에는 덩치를 키운 수목들이 들어서 흔적만 남겨놓았고 피난민들의 삶터였다는 것도 동네 사람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고 이신길 북암1리 이장의 설명으로 겨우 알 수 있었다.
이날 동학북접사업회 회원들이 넘었던 수철령(水鐵嶺)은 지금과 같은 신작로 큰 국도가 개설되기 전 옛날 북암 주민들이 보은장을 오가던 지름길이었다.
걸으면서 아무리 봐도 철이 나왔을 것 같은 지형이 아닌데 고개 이름에 무쇠를 의미하는 철(鐵)이 들어있어서 고개와 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궁금증이 더해간다.
1989년 보은문화원이 발행한 '보은의 지명'에 수철령은 보은읍 종곡리와 속리산면 북암리 양 마을에 설명돼 있는데 나무가 별로 없어 바위만 있는 산이라 하여 무수목이라 했다고 설명돼 있을 뿐 무쇠와는 관련성이 없었다.
오히려 나무가 없어 '無樹'라고 했고 잘록한 부분을 일컬을 때 쓰던 목이 붙여져 무수목이 된 것. 이것이 '무쇠목'으로 변질되었고 이를 한자로 바꾸니 수철령으로 둔갑(?)한 것이다. 철이 나는 곳으로 착각하게 만든 지명인 듯싶다.

이곳은 어떻게 동학군의 퇴로가 됐나
 1894년 북실은 동학군들이 처절한 최후를 맞은 곳이다.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군은 청산에서 휴식을 취하며 식량과 겨울옷을 준비해 휴식을 취하던 중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 소식을 접하고, 12월 16일 취회지였던 장안까지 들어왔지만 장안 취회지는 이두항이라는 사람이 흔적도 없이 모두 불태워져 동학군들은 12월 17일 저녁 북실로 들어갔다.
동학군들은 구 속리산석재 뒤 둥글레봉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며 평화로움 속에서 위태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동학군들이 이곳에 있다는 첩보를 접한 일본군은 장안 구인리에 주둔하며 동학군을 치기 위해 밤 10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해월 최시형 등 동학군 지도자들은 김소천가와 지막골(금학동)에 막사를 지어놓고 지내고 있었다. 밤 10시 30분이 되자 일본군은 구인리에서 오창→누청→강신→성족→종곡리로 쳐들어갔고 동학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총소리에 놀란 동학군들은 마을 밖으로 달아났지만 일본군을 추격해 요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산으로 올라간 동학군들이 반격하며 한밤중에 총알이 우박을 뿌리듯 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됐다.
동학군은 새벽까지 몇 번을 역습하는 전투를 계속했고 18일 오전에는 종곡부근 고지를 점령하며 일본군에 맞섰다. 일본군에 절대 밀리지 않으며 일본군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중과부적, 동학군이 보유하고 있던 총알이 모두 떨어지고 힘도 부쳤다. 동학군의 제1선이 취약해져 급기야 저지선이 무너졌고, 동학군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총알이 떨어진 동학군들은 몰살되고 말았다. 사망자가 2천600여명에 달했으며 그 때가 12월 18일 오후 3시였다.
살아남은 동학군들은 퇴로를 찾아 수철령을 넘고 북암리 터골을 거쳐 괴산, 강원도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북암리 부내실로도 10명이 숨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말티재를 넘어 북암리로 뒤쫓아온 일본군은 민가를 샅샅이 수색해 동학도를 색출했다.
여기서 꼬리를 밟힌 7명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부내실 주민들이 하인이라고 둘러대는 등 신분을 감춰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7명의 시체는 부내실 주민들이 집단매장을 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2017년 부내실 주민들의 증언을 채록, 확인한 것이다. 6월 3일에는 집단매장지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넋을 위로한 바 있다.
이후 2018년 사단법인 동학혁명북접사업회가 창립된 후 부내실 이병골 집단매장지를 정비하고 지난해에는 안내표지판을 설치하고 상사화를 식재하기도 했다.

매주 토요일 동학 순례길 도보 산책 계획
수철령 걷기를 주관한 동학혁명북접사업회(약칭 동학민회)는 동학 순례길을 개발했다.
1코스는 옥천 청산 문바위골에서 보은 장안까지 총 26㎞에 구간이다.
코스는 문바위골-청산공원-예곡교-대성마을-원정마을삼거리-선애빌-기대마을-고봉정사-관기초교-수문2구마을회관-불목마을-봉비마을-장안마을까지이다.
2코스는 장안에서 북실을 지나 수철령을 넘어 북암까지 이어지는 17㎞이다. 장안마을 동학민회지-구인마을-오창마을-누청마을-성족마을-강신마을-종곡마을-수철령-북암마을 보은최후학살매장지 구간이다.
이 길들은 해월이 기거하며 늘 걸었던 곳이다. 해월 최시형은 36년 동안 관의 지목을 피해 이 땅 곳곳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해월을 생각하면 동학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오직 동학만이 삶의 근본이요, 근간이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은 동경대전에 잘 드러나 있으며 그는 현실 삶을 통해 그 모든 걸 실천하는 생을 살았다.
동학혁명북접사업회는 해월 선생이 걷던 그 길을 걸는 지속적인 동학 순례를 통해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도를 증진하며 상식적으로만 알았던 동학이 저마다의 가슴에 따스하게 구체적으로 연착륙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동학혁명북적사업회 조정미 사무국장은 "동학 순례길을 걸으면서 '우주에 가득 찬 것은 도시 혼원한 한 기운이니, 한 걸음이라도 감히 경솔하게 걷지 못할 것이니라'라는 해월의 말씀을 새길 수 있을 것"이라며 "동학민회'에서 주최하는 동학 순례길에 다양한 이들이 참여해서 잃어버린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고,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바람과 삶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조 국장은 "토요일마다 동학 순례길 걷기를 하고 있으며, 순례길 걷기를 희망하는 주민은 누구든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동참(☎043-543-1893)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한편 동학혁명북접사업회는 △동학 순례길(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외에도 △동학학당(인문학스터디 매월 첫째주 토요일 저녁 7시) △동학교실/진로교실(학생대상) △방정환 하늘학교(방과후 돌봄공부방 월~목 오후 4시) △동학행사(보은 동학민회) △동학이 꽃피는 마을(장안마을 꽃길 조성 사업)사업을 펼치고 있다.

북실마을 종곡저수지를 지나 동학군의 퇴로를 따라 걷는 동학 순례길. 수철령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학혁명기념사업회 회원들.
북실마을 종곡저수지를 지나 동학군의 퇴로를 따라 걷는 동학 순례길. 수철령 정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동학혁명기념사업회 회원들.
속리산면 북암2리 부내실 이병골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
속리산면 북암2리 부내실 이병골 입구에 설치된 안내판.
집단배장지에서 회원들이 학살당한 동학군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집단배장지에서 회원들이 학살당한 동학군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수철령을 넘어 북암리 터골에 있는 저수지.
수철령을 넘어 북암리 터골에 있는 저수지.
무수목 화전민들의 집터 흔적.
무수목 화전민들의 집터 흔적.
소나무는 이렇게 상처를 안고 죽어갔다.
소나무는 이렇게 상처를 안고 죽어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 같은 풀꽃들이 순례길 곳곳에 피어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들여다 보게 만들었다.
연분홍색의 철쭉꽃. 초록의 터널 속을 형광빛으로 발산해 주변까지 환하게 만들었다.
북암리쪽은 사람이 일부러 벌목을 한 것처럼 나무들이 어지럽게 꺾여있었다. 아마도 뿌리가 약한 나무가 태풍 등의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제 한 몸을 누이며 세상을 하직한 것 같다.
북암리쪽 무수목에는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 집터가 이렇게 남아있다.
무당개구리 배의 모습이다. 정말 빨갛다.
멧돼지가 놀다간 흔적이다. 물웅덩이에서 몸을 비비며 멧돼지는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균 등을 죽인다고 한다.
버섯이 꽃초럼 피었다. 죽은 나무는 버섯이라는 생명을 잉태한 것이다.
북암리 터골마을의 모습이다. 멀리 수철령을 안고 있는 한남금북정맥 산 능선이 부드럽게 다가왔다.
북암리 터골저수지. 물그릇 가득 고요함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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