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분노
[칼럼] 분노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5.14 09:26
  • 호수 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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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강 환 욱
보은교육협동조합햇살마루 이사

장애를 가진 아이와 한 해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분노조절장애였는데 불안장애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성의 울타리 안에서 적절히 통제되는 것들이겠지만 이 아이의 울타리는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휘청거렸습니다.
처음 한 학기 동안은 교실에서 아침을 챙겨주기도 했습니다. 아침을 거른 채로 약을 먹거나 둘 다 거른 채로 등교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날의 아이 컨디션은 최악이어서 보통 때 보다 난폭한 언행이 쉽게 일어났습니다. 아이의 집안은 다자녀라 어머니의 체력이 저하되어 있었기에 이런 것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었는데, 순순히 시리얼과 약을 먹는 날이 있는가 하면 저항하며 버텨서 나쁜 운세를 암시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이 아이의 기저 욕구는 '사랑, 관심, 인정'에 대한 갈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자신이 하는 행동은 이를 얻을 수 없는 행위들이었죠.
수업 중 뜬금없이 "선생님 방방장 타고 싶어요."라고 하여 지금은 곤란하다고 답하면 순간 다른 인격으로 돌변하여 "방방장 다 찢어버릴거야."하는 식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움과 타박을 주로 받아왔고 그로 인한 좌절은 오랜 기간 동안의 깊은 분노로 쌓여있는 듯했습니다. 학교폭력이나 교권침해의 사례는 거의 매주 발생했고, 억압의 방식은 이미 눌려있는 용수철을 더 누르는 위험한 접근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치유적인 효과가 없었죠.
그나마 이 아이와의 생활을 겨우 유지할 수 있었던 방법은 지지와 몰두였습니다. 기 싸움 대신 이해와 지지의 시선을 보내는 것이 훨씬 나았고, 몰두할 수 있는 것을 제공해주면 그 작업에 빠져 고요했습니다.
"선생님 00이 죽여버릴 거에요."라고 말하면 "너 미쳤어?"가 아니라 "그래? 무슨 일인데?"로 시작하는 것이 나았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모든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측면이 아주 강하기에 "그래 너라면 그럴 수 있겠다."라고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었죠. 그만큼 자신의 분노를 봐달라는 것이지 실행할 마음은 없거든요. 저부터 이 아이를 아픈 아이로 보아야 했고 그것을 알기까지의 과정은 고난스러웠습니다.
처음에는 양육환경이 장애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위아래의 다른 형제들은 그런 특성을 보이지 않았기에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상 기질이 주요 원인 같았습니다. 애초에 그런 영혼이 이 아이의 몸에 들어온 것이죠. 발도르프교육에서는 엄마의 몸에 아이가 잉태되고 몇 주 후에 한 영혼이 그 아이의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이것이 더 과학적이라고 여깁니다. 사람의 물리적인 것은 부모를 통해 형성되었지만, 영혼과 정신 또한 부모로부터 형성된 것일지 아니면 스며든 것일지 판단해보는 것이죠. 나의 의식조차 부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 어색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아이 또한 그 본질인 영혼과 기질적인 특성은 그렇게 타고났다고 여겼고 이 아이가 측은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랑, 관심, 인정'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고 고집을 부리는데, 이것이 커다란 신체에 비례해 과격하게 나타나는 것이죠. 남들의 흘러간 시간이 이 아이에게는 공백으로 남아 커다란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권해본 목공이 없었다면 하루하루가 더욱 전쟁터였을 겁니다. 어린아이가 무언가 뚝딱거리기를 좋아하듯 이 아이도 그랬습니다. 뭔가 혼자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작업에서 도움을 청했을 때 도와주면 '선생님 짱', '선생님 최고'라는 애교도 날릴 줄 알았습니다. 욕구가 충족되니 바로 인심이 후해지는 것이죠. 그렇게 또래보다 한참 어린아이로 바라보아야 했고 저를 이용토록 했습니다.
이 아이의 병리적 현상을 악화시킨 최대의 주범은 스마트폰인데, 어렸을 때 갖게 된 이후 자극적인 유튜브에 오랜 기간 노출되어 그 안에서 본 반사회적인 언행을 쭉쭉 흡수한 상태였습니다. 사람의 머리가 뚝배기로 보이는 것이죠. 이것만큼은 부모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런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게 뭐가 힘드냐며 비아냥거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담임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자신이 겪지 못한 타인의 고난을 함부로 재단하는 행위는 무척 안타까웠지요. 교실이라는 공간에는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꽃들과 이를 보살피는 담임이 있는데, 이들이 학교의 첫째 주인공임을 모르기도 합니다. 교실 밖에서는 이들을 조력하며 협력하는 문화가 필수적이죠. 특히 이런 시국에는 더욱 그렇고요.
이 아이의 결론은 해피도 새드엔딩도 아닙니다. 결과적으로는 정신의학과에서 전문치료를 받게 되어 다행이지만 외부와는 격리된 상태이고 자발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사건에 의해 가게 된 것이거든요. 저도 부모님도 한계를 마주했죠. 그 사건들을 이곳에 담을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아이가 보이는 이상행동의 이면을 봐줄 수 있는, 진심으로 지지해줄 누군가가 계속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은 모든 아이가 그럴 것입니다.
요즘의 아이들을 보면 학습보다 치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자연주의 보다는 방치에 가까운 아이들, 너무 일찍 지워진 지식의 짐에 힘겨워하는 아이들, 여러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결핍을 호소하는 아이들, 결국 그 분노가 밖을 향하는 아이들.
충족되지 않은 욕구는 저축이 되고 잠재적인 분노는 잔액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놀이의 여백, 적은 잔소리, 많이 들어주는 것 등이 필요하겠죠. 특히 잔소리는 그저 어른이 화가 났다는 인상만을 전달하여 관계를 멀게 만들고 정작 메시지는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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