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름다움을 더하는 절기
[칼럼] 아름다움을 더하는 절기
  • 김경순
  • 승인 2020.04.29 09:20
  • 호수 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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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경 진
마로 한중/한살림

만천하의 곡식을 비가 흠뻑 키우는 '곡우'가 지났다. 올해 곡우에는 하늘에서 곡우날 비를 내려주셨다.
하늘에서 절기와 일기를 딱 맞게 맞춰주시는 날이면 농사짓는 마음이 왠지 안정되면서 작물에도 좀더 정밀하게 마음이 쓰여진다. 역시 안심하고 농사에 전념하려면 하늘이 도와야 하나보다.
한해의 농사는 전년 농사의 희망으로 연장되어 이어져 온다. 올해 거둔 수확의 결실 또한 내년의 농사를 이끄는 힘이요 씨앗이 된다. 다만 한해 농사만으로 다가 아니기에 항상 적당한 선이 중요하다. 너무 과하면 금세 정도를 벗어나 어긋나진다. 욕심으로 인해 어긋나다 보면 낭패가 되고 낙심하면 기운이 후퇴한다. 결국 때를 놓치고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때는 결코 기다려주지 않고 생명현상은 냉정하기만 하다. 우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시로 변하는 기후와 수없이 반복하는 계절에 사람은 일일이 맞춰가면서도 지루해질 수 없다. 이렇듯 농사는 우주운행과 일치시켜서 살아왔기에 인류의 모든 직업에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기반이 된다.
한해의 월력에 따라 무식할 정도의 정성과 세심함으로 일하다보면 어느새 농사가 즐거워져 있다. 집중하고 사랑하는 작물을 보듬어주면 작물에서 빛이 나는 듯 하다. 정말로 생명은 빛이라는 느낌이 든다. 연두빛 신록이 빛나면 꽃색은 더욱 화사해진다. 기분좋은 충족감이 일어나면서 그 다음 과정의 생명현상을 기대하고 마음을 주게 된다.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다.
농사는 쉬지 않고 연중 작물도 살피지만 몸도 함께 아울러 보살펴야 두루 바르게 돌볼 수 있다. 몸을 상하게 되는 것도 정도를 놓치는 일이다. 만약 어떤 외부 요인이나 우연한 실수로 인해 작물이나 몸의 건강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다음 절기를 준비하는 것에 더하여 어긋난 질서를 회복시켜야 하는 과제까지 겹치면서 힘이 몇 배가 더 들고 일은 더욱 고되어진다. 즐겁지 않고 아름답지 않게 되는 일인 것이다. 농사든 건강이든 그래서 방심할 틈이 없다. 한번 상한 작물도, 한번 잃은 건강도 회복하기는 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명력이라는 것이 환경만 맞춰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복원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다른 누구도 무엇도 아닌 '생명력' 그 자체를 믿고 따르라는 말도 있다.
요즘 농사지으러 골짜기 밭에 올라가다보면 봄나물을 뜯으러오는 타 마을 사람들을 종종 보게된다. 저들 중 일부는 하천이나 길가에 쓰레기를 버리고 가기도 한다. 이를 보면 내내 기분이 언짢아진다. 그러나 나도 바로 주워 치우지 않고 다음에 치워야지 하고 두고갔다가는 다음날 더 많은 쓰레기가 버려져있는 상황을 만나게 된다.
반대로 바로 청소하면서 환경을 보전하면 쓰레기가 늘어나는 횟수를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작은 빈틈이 큰 구멍이 되듯이 지저분한 환경은 무심코 지저분한 쓰레기를 보태게 만든다. 도시만 해도 더러운 골목은 갈수록 더욱 더러워지지만 예쁘고 깨끗하게 정돈된 골목에는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못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질서를 따르고 절기에 순응하게 되어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은 그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다.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아무리 혼란스럽고 경제가 어려운 시기일수록 마음을 잘 다스리고 방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인류가 아무리 어려운 위기를 겪는다고 해서 이를 교훈삼아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사회를 바꾸거나 개선시킨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고 행동했었느냐가 관건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경제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빠르게 자연환경이 회복되면서 대기가 맑아진다고 한다. 경제만큼이나 자연환경도 중요한 가치라 한다면 이를 지켜가려는 마음도 당연히 살펴주었으면 한다. 즉, 자연환경을 회복하면서도 경제를 살릴 방법을 생각해봐야 한다.
거시경제에서 미시경제로, 자본의 경제에서 일상의 경제로, 지정학 경제에서 생명권 경제로 전환하는 상상력을 훈련해봤으면 한다. 이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 아니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일 것이다. 오히려 수만년 동안 인류가 가장 잘 적응해 살아왔던 것이 바로 성장없는 시대의 '탈성장 유전자'가 아닐까 싶다.
100년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100년 후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생각하는 것과 전혀 생각조차도 해보지도 않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를 만났다고 해서 '닥치고 개발'같은 것으로는 이제 더 이상 답이 안나오게 되어있다. 그것은 지구의 환경과 시대가 그 전과는 다른 절기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절기는 여름을 준비하는 '입하'이다. 신록은 더욱 짙어질 것이고 꽃은 열매로 전환되어갈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생명환경이 잎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방편인 경제는 꽃이다. 우리가 살았던 지난 절기가 '부익부 빈익빈'의 시대였다면, 이제 다가올 절기는 '선익선 악익악'의 시대이고 '미익미 추익추'의 환경이 될 것이다. 다시 양심과 윤리를 말해야 하고 그것이 진정한 경제이고 삶이 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징조는 충분하다. 예를 들어 청년과 미성년자까지 연루된 'N번방 사건'의 본질도 사실 성문제나 형법문제 이전에 '교육'문제가 이미 갈때까지 갔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이렇듯 우리의 위기는 도처에 드러난다. 미래를 생각하는 민초여야 앞으로 살고,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때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절기를 맞추어 이루어내는 세상 농사만큼은 아름답고 재미있고 편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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