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춘래불사춘
[칼럼] 춘래불사춘
  • 보은사람들
  • 승인 2020.04.02 09:36
  • 호수 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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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전 경 진
마로 한중/한살림

봄이 와도 봄이 아닌 것 같다. 꽃도 풀도 없으니... 삭막한 초원에 가서 살게된 중국의 미녀 왕소군의 심정을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노래한 구절이다.
꼭 보여지는 것이라고 그 내용을 다 채울 수 없다는 뜻이며 다양한 응용을 하면서 속마음의 정서를 은유하기도 한다. 추래불사추, 가을이 와도 가을같지 않다. 남아서 엎어버리고 거저팔리는 농산물을 바라보는 빚쟁이 농민의 한숨같다. 동래불사동, 겨울이 와도 겨울같지 않다. 기후변화로 더 이상 겨울같지 않은 풍경에  햇살보고 핀 애꽃은 밤서리에 낙화한다.
코로나 사태가 심각단계에서 좀처럼 완화되지 않고 결국 단 2개월 만에 전세계 도시로 확산되었다. 그만큼 세상은 도시를 매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생각보다 우리가 믿었던 과학기술과 사회조직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느끼게 된다.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 게임하고 영화보고 배달시킨다. 그러나 잠시 코로나 바이러스가 발생하기 전의 상황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작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지구 남반구의 광활한 숲이 수 개월간 지속된 산불에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그로인해 아마존과 호주의 숲은 회복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지구반대편에 살고 있는 한 개인에게 어떤 직접적인 영향을 바로 끼치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엄청난 규모의 산불이었지만 먼 나라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시간성이 관건이다. 지구 한곳의 불쏘시개가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손톱끝까지 영향을 주는 것은 지구에 사는 누구든 언젠간 전달된다. 왜냐하면 열기를 식혀주는 라지에타가 녹아버린다면 어떤 기계도 가열되어 망가지는 것처럼 태양을 식혀주는 대규모 숲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동안 북반구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식혀줄 냉각팬이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구는 엄청난 태양열이 내리쬐는 꽉막힌 하우스같은 곳이다. 가중되는 오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산소를 발생시키는 숲과 양끝의 냉동얼음이 해류를 순환시키고 다양한 생명체가 각각의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그나마 서로 먹고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하나하나가 지구의 구조를 닮고있고 유사한 구조끼리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어떤 것에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것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은 환경문제이고 해결은 생태적 패러다임 전환뿐이다.
내가 겪은 얼마전의 이야기를 하며 말을 마칠까 한다. 내가 사는 우리 마을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내가 농사짓던 계곡 골짜기에 주철사방댐을 건설한다고 한다. 매일 계곡을 보며 살아온 내 관점에서는 사방댐이 갖는 홍수예방과 유실방지를 위한 목적과 효과의 득은 적고 생태적이며 환경친화적인 마을발전의 측면에서의 실이 많다고 판단되었다.
주민설명회에서 반대의견을 이야기했더니 마을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방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내게 심한 모욕적 언사와 인신공격을 하며 귀농자를 싸잡아 비난하였다. 나름대로 마을에서 주민들과 잘 지내고 남에게는 결코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개발'이라는 가치관 앞에서 사람들이 삶을 바라보고 있으며, '경제(돈)'이라는 목적이 얼마나 막연한 믿음을 주는 것인지를 느끼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이 다른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가치관이 마을과 환경에 있어 분리되는 지점을 새삼 보게 된 것이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는 정작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향촌, 마을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해보지 못했다.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있다. 굴러온 돌이나 박힌 돌이나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결국 같은 돌이다. 자신만이 정당하다는 원인은 각기 다를지라도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면 나도 마을사람과 마을을 대상화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하였다. 귀농한 사람이 보는 마을과 생존해오던 사람이 보는 마을이 서로 다른 것이다. 마을이나 자연이 도피처도 아니지만 돈벌이수단도 아니다. 향촌문화가 구태의 촌스럽고 무식하여 계몽하고 개발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문화와 전통을 온전히 보전하고 계승하는 곳도 이미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을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물론 나는 무분별한 개발과 인격을 모독하는 모든 행태를 반대한다. 그러나 너와 내가 다르다고 느낄 때 단정짓고 미워하고 분별하기 이전에 우리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그것 때문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원불교에서는 동포은혜를 이야기하지 않는가? 마을사람이 있어서 내가 마을사람인 것이다. 보은사람이 있어서 나는 보은사람인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진정 안다면 그것으로는 오직 나를 다듬는 도구로서 사용해야 한다. 남을 가르치고 단정지으려만 든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관념을 위한 폭력의 도구가 될수 있다.
향촌의 촌스러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나무 한그릇 자리잡은 것도 돌 한덩이 땅에 박힌 것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척도가 달라진다면 내 것에서 한두개 빼고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기준이 바뀌어져야 한다. 앞으로 코로나 사태는 질병위기를 넘어서 유래가 없던 경제위기와 생태위기와 함께 몰려올 세이다. 이를 맞이할 생존의 척도가 달라진다는 것은 생활의 모든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촌에서 살아가는 모든 마을 사람들은 일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외지인면서도 토박이가 되어야 한다. 촌래불사촌이 아니라 세계일촌으로 간다.
만공선사께서 세계일화를 말씀하셨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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