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sky와 같은 상위 대학에 들어가거나 전교 석차가 높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 전제 하에서 우선 모두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일부 '소수'의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할 뿐이죠. 그리고 그것은 그 '소수'의 학생들에게 주어진 재능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러워할 필요도,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학생들이 공부라는 재능을 취하듯이 다른 학생들도 각자의 재능을 찾아 몰두하면 됩니다. 각각의 재능에 옳고 그름과 귀하고 천함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이 사회와 어른들이 공부라는 재능에만 지나치게 조명을 비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쏟게 만든 뒤에 나 몰라라 할 뿐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게 만들어서 한 눈을 팔 여유조차 주지 않고는 정작 각자의 재능은 왜 찾지 못했냐 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흑백의 구조 속에 갇혀있습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학생들을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로 양분해버립니다. 그러한 답답한 구조 속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에 갇혀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가정은 1차 교육기관이고 학교는 2차 교육기관입니다. 어느 학교도 '공부를 잘하는 아이'를 목표로 내세우지는 않습니다. 전인적인 교육을 통해 꿈과 소질을 계발한다는 학교가 대다수입니다. 즉 학교는 꿈과 소질, 타고난 재능을 찾아 심화시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그 과정에서 공부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 만큼 배우면 됩니다. 국가에서 제시하는 필수적인 내용과 수준을 익히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기초적인 수준이라는 것이 초등과정은 누구나 납득할만하지만 중등 이후부터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너무 어렵고 지나치게 방대한 것 같습니다. 실용성과 형평성의 문제도 대두되며 시험을 치르기 위한 용도로 의심을 받습니다. 당연히 소수의 학생들만 앞서가고 다수의 학생들은 뒤처집니다. 학원의 뒷받침으로 그나마 선두를 따라가기도 합니다. 뒤처진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한심하다는 낙인이 찍히고 불만은 쌓여갑니다. 사랑받고 격려받기 위하여 태어났는데 공부라는 녀석이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면서 그 분노는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표출이 됩니다. 게임이 그나마 위안이 되기에 더욱더 의존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내면에 심어져 있던 재능의 씨앗은 칭찬받으며 자랄 기회를 잃어갑니다.
이런 측면에서 독일의 시스템은 인상적입니다. 독일의 수능은 통과와 미통과를 가를 뿐입니다. 1점이라도 더 얻어서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는 1점을 올리기 위해, 1등급을 올리기 위해, 결국은 남보다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몇 년의 학창시절을 헌납합니다. 나와 주변을 돌아보기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삶을 위한 최소한의 수준을 익혔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수능이 되어야 그런 여유가 생길텐데 말이죠.
방송에서 누군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자녀를 의대에 보내려고 애쓰지 말고 부모 본인이 공부해서 의대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이죠. 자녀는 부모의 욕심이 투영되는 부모의 소유물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교육은 자녀가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첫 번째 장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에게 한 가지의 색만을 강요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각자의 다양한 색깔이 존중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무채색의 세상이 아니라 무지개빛 알록달록한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학교에 다녀서 학교를 싫어하는 학생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다시 성적으로 줄을 세우려는 시도는 탁상공론에서 그치길 바랍니다. 학위와 스펙 장사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 소비자들이 건강하길 바랍니다. 사회는 그대로라도 어른들의 열린 시선이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환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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