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명환 전몰군경유족회 보은지회장이 들려주는 '한국전쟁'
나명환 전몰군경유족회 보은지회장이 들려주는 '한국전쟁'
  • 류영우 기자
  • 승인 2011.06.02 09:18
  • 호수 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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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산 한 평생, 아쉬움은 없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데 일조

3일 동안 다부동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뺏고 빼앗기기를 몇 차례.
마침내 우리군은 18명의 특공대를 결성해 다부동 고지를 확실히 점령하기로 한다.
"탕, 탕, 탕"
요란한 총성이 이어지면서 여기저기 사상자가 속출했다. 눈앞은 아비규환의 전장이었다.
18명이었던 대원들은 어느새 6명 밖에 남지 않았다.
병력지원 요청에 다시 9명의 대원들이 합류했고, 힘을 얻은 특공대원들은 끝내 고지를 점령했다.
"탕"
고지를 눈앞에 두고,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귀가 아닌 몸이 먼저 총성을 받아들였다.
묵직한 무언가가 왼손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손에 힘이 빠지면서 들고 있던 총마저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총을 바라보는 청년의 의식도 조금씩, 조금씩 사라져갔다.
지난해 소개된 한국전쟁 참전 용사 안주훈(산외면 대원리)씨의 얘기다.
한국전쟁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쟁을 손꼽으라고 하면 지금의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에서 벌어진 다부동 전투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현장에 있었던 또 한 명의 참전용사가 있다.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충북지부 보은군지회장을 맡고 있는 나명환(80, 속리산면 상판)씨다.
아니, 그는 다부동 전투를 넘어 평양탈환과 1·4후퇴까지, 최전방에서 한국전쟁의 아픔을 느껴야했다.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
나명환(80)씨가 태어난 곳은 속리산면 상판리다.
상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안씨는 20살이 되던 1949년, 보은경찰서 특별경찰대에 소속돼 공비토벌에 나섰다.
다음해인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피난민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그는 7월17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에서 현역으로 입대했다.
보은경찰서 특별경찰대 활동을 인정받은 그는 입대 후 분대장이라는 중책을 맡는다. 그리고 그가 첫 임무에 나서게 된 부대는 최전방 전투현장에 식량을 배급하는 보급부대였다.
"영천과 대구 팔공산. 이곳을 빼앗기면 나라를 잃는다는 각오로 싸웠다. 치열했던 전쟁터인 만큼 참혹했다. 하룻밤만 지나면 시신들이 온 산을 덮을 정도였으니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미군 사령관조차도 한국을 포기하고 UN철수까지 고려한다는 얘기가 나오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9월24일. 뺏고 빼앗기기를 하루에도 몇 차례나 할 정도로 치열했던 다부동 전투에서 우리 군이 승리한다.
이후 북진.
나명환씨 역시 서부전선을 따라 움직이던 1사단 15연대 소속으로 함께 북으로, 북으로 향했다.
보급부대에서 중대 전령으로 활동하게 된 나명환씨는 소속 부대와 함께 서울을 수복했고, 38선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8월20일. 평양까지 점령한 우리 군은 북진을 이어갔다.
"평양북도 운산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이 몰려왔지. 정말 어마어마한 인원이었어. 밀리지 않기 위해 1주일을 싸웠지만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중공군에 밀려 우리 군은 남으로, 남으로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리 군과 함께 피난민들도 남으로 향했다.
"전쟁 중에 피난민들이 거리로 밀물같이 몰려 나왔는데, 그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몰라. 바로 전쟁의 참상이지."
그렇게 또 다시 38선까지 후퇴했다.
1951년 1월4일에는 서울까지 내 주었다.
하지만 전황은 다시 호전됐다.
3월20일에는 또 다시 서울을 수복했고, 우리 군은 임진강까지 전진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북진은 없었다.
"당시 휴전 회담 제의가 들어왔고, 판문점에서 회담이 이루어져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했어. 그 후 2년. 정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성과 없는 싸움만 이어진 셈이지."

 

◆부상, 그리고 휴전
전투는 계속됐다. 전진도, 후퇴도 없었다.
그리고 1952년 6월이 찾아왔다.
나씨는 그때까지 전령으로 활동했다.
6월2일 저녁이었다. 그날은 우리 군이 기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이어졌다.
기습 전, 우리 군의 성급한 총성인줄 안 중대장은 사격 중지를 명령했다.
나씨는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밖으로 뛰쳐나가 "사격 중지!"를 외쳤다.
북한군의 총구는 바로 나씨를 향했고, 나씨는 오른손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병원으로 이송돼 있었다. 오른손 손가락 하나는 총에 맞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손바닥은 총알이 뚫고 간 흔적으로 제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해 11월25일, 제대를 했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고, 다음해인 53년 7월27일 휴전이 결정됐지."
휴전이 됐지만 나씨는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타까움이 앞섰다.
"우리의 목표는 통일이었어. 이기지도, 지지도 않은 상황이 서글프고 안타까웠다. 그래서 휴전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였지. 어떻게든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후회 없는 삶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상처는 컸다.
오른손에 총상을 입은 것은 물론 51년, 공비 토벌에 나섰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지만 그는 전쟁을 통해 상처를 입은 이웃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상이군인회 속리산면 연락소장을 맡으며 전쟁에서 상처를 입은 이웃들을 도와주었고, 지금도 대한민국전몰군경유족회 보은군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가난한 나라에서 살아왔다. 그러던 중 나라가 위험에 처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까지 갔다. 돌아와서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사회를 위해 봉사도 했다. 나만의 노력이 아니라, 그 당시 나라를 지켰던 모든 사람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됐다. 지금까지의 삶. 정말 아쉬움은 없다."
아쉬움은 없어도, 바람은 있다.
우리의 대한민국. 언제까지나 훌륭한 나라로 존재해야 한다는 바람.
나명환 지회장의 바람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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