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왔던 경험이 나를 안착시킨다
내가 살아왔던 경험이 나를 안착시킨다
  • 편집부
  • 승인 2019.05.30 10:24
  • 호수 494
  • 조회수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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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리스트 전경진 (마로 한중/한살림)

논에서 물가지고 난감해지는 일은 농가지상사이다. 어쩌다 10년 만에 3마지기 논을 얻어 논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역시 논은 물대는 일과 물 빼는 일에 신경을 쓰게 됐다. 과거에는 모두 다랭이 논이었던 곳이 집도 들어서고 밭으로도 지형이 바뀌면서 예로부터 내려온 물들어오는 곳과 물빠지는 곳이 좁은 한길이다. 나가는 물길도 주의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물대는 일이 더 신경쓰인다. 윗논이 계속해서 물을 대주어야 하는 사질논이라 좀처럼 내 아랫 논에는 물댈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이 밤에 살짝 대놓다가 새벽에 다시 원위치 시키는데 윗논 주인은 더 늦게까지 있다가 자꾸 원래대로 자기 논에 물을 대놓는다. 그런 중에 어쩌다 논에서 만나면 참으로 서로 어색해진다. 그래서인지 내게 뜬금없이 논갈이를 경운기로 해보라고 권하신다.
"농사충고를 하나 하겠네. 자네 경운기 가지고 논로터리 치게. 논 로터리에는 경운기로 가는게 최골세." "바빠서 트랙터 로터리 부탁해놨습니다." "그래도 경운기로 갈아보게. 옛날엔 다 그렇게 했어. 그게 더 좋아."
내가 트랙터 없는 거 아셔서 신경써주시느라 그러시는 건지, 그래도 어째 저러시나싶다. 본인도 트랙터로 하시면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뜬금없는 경운기로터리를 권유받다보니 왕년의 추억을 이야기하시는 동네 노인들이 생각났다.
노인분들과 회관에서 만나면 왕년의 전성기를 이야기하시느라 항시 바빴다. 탈곡기를 지고 산을 넘은 이야기부터 경운기로 만평의 밭을 갈은 이야기를 하면 소로 쟁기질하고 버드나무 썰어서 논에 퇴비준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더 오래된 어른은 '애들이 6.25때 얘기하고 앉아있네...허허... 니들이 왜정시절을 알아? 뭣도 모르는 것들이... 쯧쯧'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다보니 살아만 계셨다면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참이다. 50년전 사건에는 지금도 얼굴을 붉히며 싸우기도 한다.
이 정도니 학교다니기 전에 박정희 시대를 마쳤던 나는 감히 끼어들 레벨이 아니다. 주로 듣던 것 또 듣고 또 듣는다. 그러다 보면 지겨울 때도 있지만 한번 들을 때와 두 번 들을 때의 느낌이 조금씩 달라진다. 자세히 들어보면 내가 모르던 마을의 숨은 역사나 전통농업의 핵심을 많이 주워듣게 된다. 물론 지금은 하지 않는 일들이고 이어지지 않는 역사들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이다.'라는 것도 본인이 지금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하는 이야기는 단지 왕년의 추억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하는 것은 왜일까를 생각해본다. 과거에 힘들게 겪은 경험이나 몸에 배인 체험이 지금의 생각과 가치관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고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인 것 같다. 노인은 비록 단순한 학력과 경력을 가졌을지 모르나 파란의 세월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닐 것이다. 마을의 역사와 농업의 핵심은 왕년의 추억만이 아닌 생생한 경험과 체감이 되어 지금의 노인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살아있는 이력서가 되어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살아온 실제 삶의 경험과 가치를 자세히 듣다보면 이 사람의 실제 알맹이 이력과 가짜 껍데기 이력이 보여진다. 어디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가?
어떤 것도 고향처럼 집착해서도 안되고 학력처럼 구속해서도 안된다. 경험도 박차고 나올 수 있고 체득한 것도 내려놓는다면 그 사람은 편안한 사람이다. 그런다고 고향이 사라지고 지식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경험으로 체득한 진실은 지워질 수가 없다.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것이 남는다. 그걸 빛내는 사람은 진정 세월의 참맛이 나는 사람이다.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는 경운기 논갈이를 권유받으면서 사람의 경력에 대해 잠시 생각이 들었다. 마을 산에 올라서 해지는 풍경을 보다보면 나의 1000년전 조상은 이 땅의 진짜 원주민이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그냥 여기 온 것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외지인이 아니고, 지금 토박이의 500년 전 조상들보다 더 오래 전에 이 땅에 살았던 더 오래된 원주민의 후손이다.' 내 마음속은 말하고 있다. 마치 새로운 땅을 찾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오래된 지구인인양…. 더는 낯설지 않은 이 땅의 옛 주인인양. 내가 살아왔던 경험은 나를 이 땅에 안착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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