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Ⅳ)
②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Ⅳ)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9.03.28 10:47
  • 호수 4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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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마을 이합집산하면서 전혀 다른 지명 만들어
1, 2구로 구분한 마을은 고유지명 찾아서 최대한 1, 2리 없애야

지명을 살펴보면서 의구심을 갖게 된 것이 있다. 보은문화원에 1989년에 발행한 '보은의 지명'을 통해 살펴본 바에 의하면 1914년 군면을 폐합하면서 자연부락 명으로도 등장하지 않는 전혀 다른 지명이 등장하는데, 2008년 발행한 '보은군 지리지'에는 1914년 이후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그 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삼승면 달산리의 경우가 그 중 하나다. 달산리는 월산, 달미라는 자연마을명이 있는데 보은의 지명에는 마을에 달처럼 생긴 산이 있으므로 달미 또는 월산(月山)이라고 불렀다고 적고 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폐합시 주변 마을을 병합해 달산(達山)리 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보은군 지리지를 보면 이미 그 이전부터 달산(達山)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표기돼 있다. 달처럼 생긴 산이 있었다면 한자로 월산(月山)이 돼야 맞으나 월산이 아닌 달산(達山)으로 표기 하고 있는 것.
영조 36년인 1760년 작성한 여지도서에 이미 달산리(達山里)가 표기돼 있다. 고종 이전에 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충청도읍지나 1865년 발간된 대동지지 등에서도 달산(達山)리가 있다. 달을 월(月)로 풀이하지 않고 월과는 전혀 관계없이 달(達)을 한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변경된 지명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또 아름다운 지명을 갖고 있는데 무리하게 통합해서 마을 명을 짓고 이후 1, 2리로 구분하고 있는 마을의 경우 1, 2리가 아닌 각각의 고유 지명을 살려 마을이름을 개정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지명지에서 이같은 사례가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삼승면 원남(워내미)
원남리(元南里)는 원암(元岩)이 맞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원암역(元岩驛)이 표기돼 있고 중종 25년 1530년에 완성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원암역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원암리가 나온다. 충청도읍지와 대동지지에도 원암이 있던 것으로 나타났다. 호서읍지에 상하원암리로 적고 있고 충청북도각군읍지에도 원암으로 적고 있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당시 복주(안동)에서 청주로 오던 중 원암에 행차하고 정해에 속리산에 거동했다가 이튿날 큰 비가 와서 다시 원암으로 돌아와 하루를 묵었다고 한다라며 원암을 적고 있다.
이렇게 현재 원남(元南)리로 불리는 지명은 원남리가 아닌 원암으로, 지명의 본 이름이 지리서에 그대로 남아있다. 원남리는 원암(元岩)으로 바꿔야 한다.

△삼승면 천남리
천남리는 오덕천의 남쪽이기 때문에 천남(川南)이라고 했다. 1914년 각각 각동(角洞), 상석남리(上石南里), 하석남리(下石南里)를 병합해 천남리라고 했다는 것. 오덕천이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또 금빛 모래가 반짝이고 주민들의 삶의 터전 즉 하천에 서식하는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촌도 아닌데 오덕천을 지명에 끌어들인 것 자체가 지역을 하대한 것은 아닐까?
따라서 1, 2, 3리까지 있는 천남리는 회인면 쌍암1, 2, 3리가 각각의 지명을 찾았듯이 천남리도 각각의 지명을 되찾아도 좋을 듯싶다.
천남1리는 석남(石南)리를 말한다. 석남리는 천남리에서 으뜸인 마을로 남쪽에 성이 있었다고 한다. 천남2리는 각골이라고 부르는데 옛 지명에 각동(角洞)이 있다. 뒷산봉우리가 사방에 뿔이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각골이라 부른다. 천남2리는 옛 지명대로 각동으로 바꿔도 좋을 듯싶다. 그리고 천남3리는 삼싱이라고도 부르는데 삼승리(三升里)가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18세기의 여지도서, 1871년의 호서읍지에도 삼승리가 적시돼 있다. 삼승면(三升面)의 어원을 갖고 있는 천남3리는 옛 지명인 삼승리를 찾으면 어떨까?

△수한면 소계리
소계리(苕溪里)는 원래 소의 목이 되므로 소매기(소맥) 또는 우항(牛項)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말곶리(末串里)와 묘북리(畝北里)를 병합해 소계리(苕溪里)라 했다.
그런데 왜 마을이름이 소계리로 정해졌을까? 소계리의 소는 풀이름 소(苕)를 썼는데 이 마을에 특별한 풀이 있어서 쓴 것도 아닌 것 같다. 지명지나 지리지 어디에서도 소계리로 정한데 대한 특별한 어원을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여지도서에서는 말을곶리(末乙串之里), 충청도읍지와 호서읍지에는 말곶리(末串里)로 표기돼 있다. 우항리는 별도로 표기하고 있지는 않다.
말곶리는 말꼬지라고 부르는 곳인데 수한초등학교 앞 동네를 말한다. 우항, 즉 주민들이 소매기, 쇠메기라고 부르는 곳은 현 양상현 이장이 거주하는 동네를 말한다. 마을회관이 있는 동네는 옛날 숯가마가 있었다고 해서 가막재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음짓말, 양짓말 등 자연부락이 많다.
문화원이 발간한 보은의 지명에는 소매기를 소계리로 연관지어놓았다. 소계리는 소매기를 중심으로 마을 이름을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소계리는 소매기 즉 우항리가 맞을 것 같다. 여기서 항은 목처럼 가늘고 좁은 곳, 들어가는 입구를 의미한다. 정감록에서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보은에도 항(項)을 갖고 있는 마을 지명이 군내에도 여러 곳 있다.

△장안면 오창리(오심불)
오창리는 1914년 일대의 오심리(梧心里), 사창리(士倉里), 오룡리(五龍里)를 병합해 오심의 오와 사창의 창을 따서 오창리라 한 곳이다
오창리에서 으뜸 마을인 오심마을 오의 한자는 계속 바뀌었다. 여지도서에는 吾(오)를 썼다. 그러다 헌종 초기인 발간한 것으로 현존 최고의 읍지로 평가받고 있는 충청도읍지에서는 悟(오)를 썼으며 일제가 개입돼 정리한 자료인 호서읍지와 충청북도각군읍지에서는 五(오)를 쓰고 있다.
그런데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정리해보면 충청도읍지에 표기된 오(悟)가 맞을 듯싶다. 세종대왕이 무슨 일을 생각하고 있다가 속리산에서 나오는 도중 이곳에 이르러 비로소 깨달았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주목한다면 오창리의 오는 오동나무 오(梧)가 아닌 깨달을 오(悟), 즉 오창리(梧倉里)가 아닌 오창리(悟倉里)가 맞을 것 같다.

△탄부면 상장리(위진미, 상장산)
진미 위쪽이 되므로 위진미 또는 상장산(上長山)이라 했다는 것이 지명지에 나오는 마을이름의 어원이다. 진미는 현재 하장리에 있는 자연마을명이다. 그 위쪽에 마을이 있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붙였다는 것인데 1914년 국덕리(國德里)와 애평리(艾坪里)까지 병합해 상장리라 했다고 한다.
상장은 어원이 있으므로 현재 상장1리는 상장리라 하더라도 상장2리는 지덕리(支德里)로 바꾸는 게 맞을 듯싶다.
지덕리 즉 지디기라고 부르는 이 마을은 현재 마을입구에도 지덕으로 표기하고 있다. 덕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해서 불리어진 이름을 살려서  상장2리는 탄부면 지덕리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탄부면 장암리(장바우, 장암)
탄부면 장암리는 장수바위가 있으므로 장바우 또는 장암(壯岩)이라 한 것이 어원이다. 1914년 경상리를 병합해 장암리라 했는데 장암1리는 장암리가 맞고 장암2리는 독립해 증생이를 살려야 한다. 즉 증생이는 가마에 쇠죽을 끊여 소에게 먹이는 형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리(景祥里)라고도 한다. 따라서 장암2리는 경상리로 바꾸는 것도 맞을 듯싶다.

△회인면 건천리
건천리는 현재 수리티재 아래에 있는 수리티 마을과 건천리의 중심인 공태원(孔大院) 마을, 그리고 아낭골(安興谷) 마을로 구성돼 있다. 마을지명의 어원은 자갈이 많고 하천이 늘 말라있기 때문에 건천(乾川)이라 했다.
마을의 어원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마을 이름만으로도 하천이 늘 말라있기 때문에 농사짓기 힘들고, 마실 물 구하기도 힘들다는 인상이 강하다.
따라서 건천리보다는 이 마을의 중심마을인 공태(대)원을 살려서 지명을 찾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이상과 같이 4회에 걸쳐 개괄적으로나마 창지개명((創地改名) 사례 점검을 마무리 한다. 1914년 일제강점기 보은의 마을이름을 병합한다는 명분아래 이합집산하면서 고유지명이 없어지거나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뀐 사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주민들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고 있다.
올해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만행에 분연히 일어난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일제에 의해 침탈된 민족문화 등 역사바로잡기 사업으로 일제에 의해 창지개명((創地改名) 당한 곳만이라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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