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창지개명으로 사라진 마을 이름들
일제의 창지개명으로 사라진 마을 이름들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9.03.14 11:04
  • 호수 4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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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이전 지리지에 지명 뿌리찾기 바람직

마을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지명들은 코지의 꼬리표가 아니다. 마을의 지형이나 산세 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정착해 삶을 영위했던 선조들과 자연의 만남이다. 조상들이 발품을 팔아 당시를 기록하고 있는 지리지에는 그 근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리지에서도 지명의 어원을 밝히기 보다는 한자어를 표기하고 있는데 유래가 이해되지 않는 경우의 이름들도 다수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본보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주도하에 군면 폐합 및 마을 폐합을 실시하면서 마을이름이 바뀐, 창지개명(創地改名)된 사례만 살펴보는 것으로 한정한다.
지난 호에서 유래와 맞지 않는 한자어를 사용한 이평리, 구암리, 구티리, 이식리는 이번호에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각각 좋은 뜻을 가진 마을이름을 갖고 있는데 일제에 의해 변경된 이름을 그대로 쓰기 보다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아 마을의 정체성을 찾는 것도 바람직할 것 같다.
대목리가 도화리로, 하개리가 개안리로 변경되고 하장2리가 당우리, 덕동2리는 석화리, 쌍암1·2·3리가 각각 계암·능암·쌍암리로, 법수1·2리가 각각 법수리·우무동리라는 원래 지명을 찾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보은읍 금굴리(쇠푸니, 은사리, 구량마을)
현재의 보은읍 금굴리 1~2리를 일컫는 동네 이름이다. 쇠푸니에 어원을 두고 금굴리로 명명했는데 1914년 은사(隱士)리, 구량(九良)마을을 쇠푸니로 병합해 쇠푸니 즉 금굴리(金堀里)로 통칭했다. 지금 소나무 공원이 있는 은사리는 선비들이 숨어 지내는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고, 모텔이 있는 마을인 쇠푸니는 고려 때 금을 많이 캤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을 말한다. 고속도로IC 옆 마을인 구량마을은 구랭이로 불리기도 하는데 아홉 개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이좋게 사는 마을이라고 한다.
이렇게 각 마을마다 좋은 의미를 가진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이름으로 통칭하고 1, 2리로 구분하기 보다는 어원을 그대로 사용해 은사리, 금굴리, 구량마을로 변경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보은읍 학림리(함림)
함림(含林)은 지금의 학림리를 말한다. 지명지에 의하면 함림산성 밑이 되므로 함림리라 불렀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다 1914년 내(內)함리, 외(外)함리, 율지리(栗枝里)와 대암리(대바위)를 병합해 학림리(鶴林里)라 했다고 한다. 학림리로 한 것은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 두루미가 많이 앉았다는 학림이란 자연마을이 있었고 또 함림보다는 비교적 발음하기 쉬운 학림을 마을이름으로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지명의 대표성으로 보면 학림이 아닌 함림이 돼야할 것으로 보인다. 대전역처럼 함림산, 함림산성, 함림역 등 함림을 따서 고유명사로 쓰고 있는 것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고 본다. 함림역은 학림2리에 있었음을 알리는 징표가 마을회관 뒤에 있다.
또 18세기에 쓰인 여지도서와 조선 헌종 때 작성된 충청도읍지, 고종 8년 1871년에 작성된 호서읍지, 1890년대 일본인들이 정리한 필사본 충청북도각군읍지에서도 학림리가 아닌 함림리로 표기하고 있다. 학림리를 함림으로 바꿀 충분한 근거가 된다.

△산외면 가고리(더구리, 덕우리)
산외면 가고리는 지형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 더구리 또는 덕우리(德友理)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고리(加古里)란 이름이 붙여졌다.
사실상 가고리는 지명의 유래를 담은 '보은의 지명'이나 '보은군 지리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지명지에는 골말, 덕우리, 부자골(부대골), 중들(중뜸)이라 불린 자연마을이 있는데 1912년 일제강점기 이후 가고리란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가고리라고 한 이유가 불분명하다. 더구리를 가고리로 오인한 것은 아닐까? 덕 덕(德), 벗 우(友)를 사용해 덕우리라 해도 좋을 듯싶다.

△산외면 대원리
여동(汝洞), 체항리(逮項里), 고점리(高店里)라 불렸던 마을은 1914년 역시 듣도 보도 못한 대원리(大元里)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개명됐다.
여동골은 현재의 대원리 입구에 있는 마을로 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마을이다. 고점리는 신선봉이 있는 마을이고 체목은 산맥이 체 모양을 생겼다고 하고 청원군(현 청주시) 미원면 계원리로 넘나드는 목이 되는 곳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다.
광무 11년 1907년 이곳은 대원리가 아닌 여동으로 불리어졌다. 2008년 제작한 보은군지에 1910년대의 보은의 모습에는 현재의 대원리를 산외면 여동으로 표기하고 지리적 위치는 산외면 소재지로부터 30리 밖에 있다고 표기하고 있다.
현재 대원리라고 불리는 마을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여동마을, 일제강점기 이전 대원리는 분명히 여동으로 불렸다. 여동은 각종 지리지에서 살아 숨쉬는 이름이다.

△산외면 신정리는 일본식 지명(?)
산외면 신정리는 일제의 식민사상에 의해 지어진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바위가 많아서 바위골, 암동이라 불렸고 광무 11년 1907년까지만 해도 암동(岩洞)이라 불렸다.
그러나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 신정리(新正里)로 고쳤다고 지명지에서는 밝히고 있는데 왜 신정리로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신정리의 어원은 신정, 구정이란 설 명절을 지칭하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신정은 한자어도 똑같은 것을 보면 일제의 잔재라고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음력 1월1일을 '설' 또는 '정' 이라 하여 새해가 되는 날로 기념해 명절로 축하는 전통풍속이 있었다.
하지만 1895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1896년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양력 1월 1일을 설로 지정했다. 대다수 조선인들은 음력설을 진짜 설로 쇠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절을 거치면서 양력을 받아들인 일제가 우리 고유의 시간개념인 음력을 못쓰게 하고 양력 사용을 강요 하면서 음력 1월1일을 구정으로 폄훼하고 양력 1월1일을 '신정'이라 하여 기념을 하도록 했다.
설을 바꾼 주체는 대한제국이지만 '구정'이라고 폄훼하며 양력설, 즉 신정을 억지로 권장한 것은 일제이다. 국민들은 양력설을 '왜놈설'이라고 해서 배척했다.
어원도 불분명하고 일제 잔재일 수 있는 신정리를 유지할 것이 아니라 종전에 불렸던 암동마을로 바꾸면 좋을 듯싶다.

△산외면 탁주리(탑자리)
산외면 탁주리는 원래 탑자봉(塔自峯) 밑이 되므로 탑자리라 불렸는데 1914년 엉뚱하게 탁주리(濯洲里)로 바뀌었다. 빨래를 빤다는 의미의 세탁 탁과 물 주(섬 주)자를 쓰는데 한자어 지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야말로 창지개명을 한 것이다. 산외면에서 세 번째로 높다는 탁주봉(濯洲峯)도 탑자봉인 셈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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