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100주년 특집 ②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Ⅱ)
3.1만세운동 100주년 특집 ②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Ⅱ)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9.03.07 11:05
  • 호수 4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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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통합 주도하며 주성면·왕래면 사라져
여러 마을 통합한 곳은 밑천 없이 엉뚱한 이름으로

이름은 그 사람을 특징지우며 그 사람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 중의 하나다. 그래서 과거 이름을 지을 때는 태어나 시간, 띠 등을 고려해 한자음과 한자의 획수까지 따져서 이름을 지었다. 한글 이름 등 보다 개성적인 이름을 선호하는 지금은 작명도 많이 자유로워졌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한자식 이름이 대세였다.

지역이름도 마찬가지다. 그 지역의 특징을 잡아서 이름을 지었다. 예를 들면 거북바위가 있어 귀바우 구암이라고 했고, 부헝바위가 있어서 봉황리라 한 것이 그것이다.

지난 호에서는 191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읍면통폐합을 하면서 지명유래와 관계없이 다른 한자를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마을을 짚어봤다. 또 2, 3개 마을을 통합하면서 2개 마을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마을이름을 만든 곳도 살펴봤다.

이번 호에서는 면이 통합되면서 사용한 면 명칭이 변방의 지역이름을 사용해 지역의 특징을 찾지 못하는 사례와 여러 개의 마을을 통합하면서 전혀 다른 마을 이름으로 탄생한 곳 중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마을이름으로 개정을 추진해야 하는 사례 등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라진 주성면, 왕래면
일제강점기이전 보은군의 마지막 행정구역 및 명칭 변경은 순조 10년인 1810년에 단행됐다.
순조는 태실을 속리산에 봉안한 후 보은현을 군으로 승격시켰고 13개 면을 관할했다.
당시 면(面)은 향후 읍으로 승격된 읍내면(邑內面)을 비롯해, 산내(山內), 서니(西尼), 사각(四角), 산외(山外, 내북(內北), 주성(朱城), 속리(俗離), 삼승(三升), 탄부(炭釜), 마로(馬老), 왕래(旺來). 수한(水汗)이다.
그러다 1914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군면을 폐합하면서 △읍내면·산내면·서니면·사각면→읍내면으로 △내북면·주성면→내북면으로 △삼승면·서니면→삼승면으로 △마로면·왕래면이→ 마로면으로 통합되고, 산외면과 속리면·수한면은 그대로, 그리고 △회인군(懷仁郡)이 폐지되고 읍내면·서면·동면이→회북면으로 △남면·강외면·서면→회남면으로 통합되어 보은군에 흡수되었다.

△내북면, 주성면
주성면의 특징은 보은현에 속하지 않고 보은현을 뛰어넘어 옥천 청산현에 속했었다. 이후 1914년 청산현이 옥천군에 편입될 때 주성면은 보은군으로 편입되고 내북면으로 통합됐다.
그런데 주성면을 흡수해버린 내북면의 지명 유래는 별다른 게 없다. 지명지에 의하면 읍내면(현 보은읍)의 북쪽에 위치했기 때문으로 적고 있다.
반면 주성면은 대동여지지, 충청도읍지 등에 의하면 원래 술 주(酒)자를 쓴 酒城(주성)이었으나 1914년 일제가 군면 폐합시 없어졌다.
酒城(주성)은 도원리 주성바위에서 유래된 것으로 도원리 (점말 마을) 서북쪽 산 15번지에 있는 바위구멍에서 술이 나와 행인 지나갈 때마다 한잔씩 흘러 갈증을 풀어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욕심 많은 행인이 한잔 술에 갈증을 해소하고 한잔 더 마시려 하였으나 술이 나오지 않자 짚고 있던 지팡이로 술이 나오는 굴을 마구 찔러 보았으나 술은 더 나오지 않았고, 그 후로 술은 나오지 않고 구멍만 남았다고 한다. 이 주성은 창리 역골 주성산성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단순히 보은읍 북쪽에 위치했다는 의미를 부여한 내북면으로 할지 아니면 현 면 소재지가 있는 면 명칭을 찾아 주성면으로 할지에 대해서는 주민들의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마로면, 왕래면
1914년 마로면으로 흡수된 왕래면은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과 인연이 깊다. 웃 솔고개와 소여리 큰말을 오가는 고개를 왕래재라 하고, 관기리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갔다가 상주→관기→삼승 원암(원남)를 거쳐 청주를 가는 길에 머물렀다는 왕래원 터가  있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조선 영조때 편찬한 여지도서나 조선 헌종 초기에 편찬한 충청도읍지, 고종원년(1865년)에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동지지, 고종 8년에 편찬한 호서읍지, 1890년 충청북도각군읍지까지만 해도 마로면(馬老面)과 왕래면(王來面)이 나온다. 그러나 1917년 신구대조(조선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에는 왕래면을 마로면으로 통합 개편사실이 기록돼 있다. 1928년부터 수년에 걸쳐 편찬한 지리지 조선환여승람에도 왕래면이 나오지 않고 마로면만 나온다. 1914년 일제에 의한 군면폐합시 통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왕래면이 없어지고 마로면으로 통합됐을까?
기자가 2015년 마로면 소재지정비사업에 참여해 '관기리 역사이야기'란 책자를 편찬한 바 있다. 당시 마로면 관기리의 역사를 알기 위해 관기리에 거주하는 고령의 어르신들을 찾아가 구술을 통해 관기리 역사를 수집, 이를 바탕으로 책을 썼다.
그 때 지금은 작고한 고 구철회 전 보은향교 전교께서 웃대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었다며 뒷 얘기를 전해줬다. 얘기인즉은 왕래면과 마로면이 통합할 당시 마로면장이 세중 출신 박씨였는데 그 면장이 면의 명칭은 마로면을 쓰는 대신 소재지는 관기리로 정했다는 것.
늙은 말을 뜻하는 마로면의 명칭이 임금 왕(王)자에 올 래(來)자를 쓰던 왕래면(王來面)을 누르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최근 보은읍 다음으로 인구나 경제력 등 지역세가 좋았던 마로면이 쇠락해 지역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 면의 명칭 변경을 제안한 바 있다. 당시 늙을 말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馬老面 대신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힘차게 달리는 말이라는 의미의 馬路面으로 변경하는 것을 제안했다. 아니면 일제 강점기 이전의 면 명칭인 왕래면으로 바꾸는 것도 제안한 바 있다.
혼선을 빚지 않기 위해 제안한  馬路面보다 사실은 왕래면이 더 의미가 있다. 왕래면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을 일제가 없앴기 때문.

#좋은 이름 두고 애써 다른 이름으로 바뀐 사례
△내북면 동산리
창상리와 신기리 일부를 합해 동산리라 했다는 동산리의 어원은 자연마을명인 청룡에서 찾을 수가 있다. 원래 청룡은 동산리에 중심이 되는 마을인데, 마을 뒷산의 모양이 좌청룡(左靑龍)에 해당돼 풍수지리설에서 산의 상징인 용이 동쪽을 뜻해 동산으로 지었다는 것. 하지만 동산(東山) 보다는 청룡(靑龍)의 어원을 그대로 살려 마을 이름을 짓는 것이 마을에 상서로운 기운이 훨씬 많이 깃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북면 적음리
내저리內底里)와 외저리(外底里)를 병합해 적음리(積蔭里)라고 했다는데 왜 하필 그늘이 쌓여있는 곳이라는 한자를 사용했을까? 마을 이름이 매우 음산하다. 마을에 햇빛이 들지 못하게 일부러 모사를 꾸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흔히 음지에서만 있거나 병세가 깊어 피죽도 못 먹은 사람을 허옇게, 누렇게 떠 보인다고 표현한다. 일제가 산의 혈을 끊고 주요 산에는 쇠말뚝을 박아 국운의 정기를 끊어놓았던 것과 같이 시름시름 앓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닐까. 적음리는 원마루라는 으뜸이 되는 마을 이름을 부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다.

△내북면 화전리
묵동(墨洞), 수평동(水坪洞), 염둔(鹽屯) 일부를 병합해서 화전리(花田里)라 했는데 어원이 없기는 화전리도 마찬가지다. 현재 화전리라고 부르는 마을 중 으뜸마을은 먹(墨)을 생산해서 먹골이라고 했고 현재 화전2리의 으뜸마을은 무두리, 수평동이라고 했는데 수평동은 마을 앞으로 항상 맑은 물리 흐르고 평평한 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근본도 없는 화전리 대신 마을 이름의 어원을 갖고 있는 묵동이나 무두리(수평동) 등 자연마을 이름을 찾는 것도 일제강점기 이전 역사를 바로잡는 것일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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