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 100주년 특집 ②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Ⅰ)
3.1만세운동 100주년 특집 ②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Ⅰ)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9.02.28 11:46
  • 호수 48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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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와 맞지 않는 마을 이름 상당수
주평→이평, 배신개→이식, 구암, 구티 등 일제 잔재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국권회복을 위해 민족자존의 기치를 드높였던 선열들의 위업과 숭고한 독립정신을 되새기기 위한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본보는 3.1운동 100주년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14일자 1면에 일제가 강제로 마을의 혈을 끊었다고 주장하는 산외면 장갑2리 일제만행 사례를 보도한 바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읍면 통폐합을 추진하며 지명 유래와 전혀 다른 이름으로 변경된 것 등 지역의 정체성을 훼손시킨 사례를 보도하고자 한다.
출처는 지난 1989년 보은문화원이 발간한 '보은의 지명'이다. '보은의 지명'은 조사 및 집필은 당시 인하대학교에서 박사공부를 하던 회인 용곡 출신 강병윤씨가 맡았다. 당시 강병윤씨는 2년여 간 군내 각 마을 곳곳을 다니며 마을 어르신들과 대담하면서 이들이 전한 구술을 바탕으로 지명뿐만 아니라 골짜기, 들, 산, 하천, 효자, 충신, 전설, 문화재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군내 마을의 법정지명은 상당부분 1914년 일제에 의한 통폐합으로 생겨났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전통 마을의 고유성을 무시한 채 통폐합을 진행하면서 각 마을의 상징성과 전통성이 사라진 곳이 많다. 조선총독부가 이렇게 통폐합을 진행한 것은 일제가 통치를 수월하게 할 목적에 입각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 100주년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뜻 깊은 해를 맞아 우리지역에서 지명유래와 전혀 다르게 정하며 마을의 상징성  및 정체성을 훼손시킨 곳에 대한 지명 찾기나 한자가 달라진 마을의 이름 회복 등 전체적인 점검 및 개정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도모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명 변경은 보은군지명위원회 조례에 의거 군지명위원회를 통과해도, 도지명위원회, 국가지명위원회를 거쳐야 최종 지명을 바꿀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지명이 바뀐 3가지 사례에 초점을 맞춰 보도한다.

#보은군 연혁
보은군은 본래 신라 자비왕 13년(470년)에는 삼년산군이었는데 경덕왕 때 삼년으로 고치고 고려 태조 때 보령(寶齡)으로 고쳤다가 보령(保令)이 되었고 조선 태종 6년(1406년) 충남의 보령현(保寧懸)과 음(音)이 같아서 보은(報恩)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23대 순조 10년(1810년) 순조의 태를 속리산에 봉안한 후 보은군으로 승격시켰다.
또 보은은 고려 8대 현종 6년(1015년)에 경상북도 상주에 소속되었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년) 충청도로 편입됐다. 순조 때 보은군으로 승격된 후 읍내, 산내, 서니, 사각, 산외, 내북, 주성, 삼승, 마로, 왕래, 수한의 13개 면을 관할했다.
이어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군면 폐합에 따라 회인군의 읍내, 서면, 동면, 동면, 남면의 4개면과 옥천군의 안남면, 안내면의 일부와 충청남도 회덕군 주안면의 일부를 병합해 보은군은 읍내, 내북, 산외, 속리, 삼승, 탄부, 마로, 수한, 회북, 회남의 10개면으로 개편됐다.
해방 후 속리면은 내속리면과 외속리면으로 분(分) 면됐고 1973년 보은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1읍 10개면 178개리를 유지하다, 1989년 회북면 묘암리와 마동리, 마구리 회남면 염티리를 청원군에 넘겨주었다. 이후 내속리면은 속리산면, 외속리면은 장안면, 회북면은 회인면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래 근거없이 바뀐 이름 무엇이 있나
일제강점기 읍면 통폐합을 하면서 마을 이름을 바꾼 사례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자를 변경한 사례 △두개 또는, 세 개, 네 개의 마을을 하나로 통합하면서 대표되는 두 개 마을 이름 중 한 자씩 따서 만든 사례 △기존 마을에 여러 개를 통폐합하면서 마을 이름을 신설한 사례로 나눌 수 있다.
상당수 마을들은 두 마을을 한마을로 합치면서 한 자씩 붙이는 형태의 마을이 많다.
그 사례를 보면 △보은읍 교사리, 성주리 △장안면 오창리 △수한면 율산리, 질신리 △회남면 신곡리, 은운리 △회인면 송평리, 고석리, 용곡리, 용촌리 △내북면 용수리 등이다.
교사리는 교동과 사례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들었고 성주리는 성저와 주교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오창리는 오심과 사창의 이름을 땄다. 율산리는 율성과 산척의 이름을 땄으며, 질신리는 질곶과 신리를 병합하면서 첫 글자를 이용해 이름을 만들었다.
용수리는 용흥과 수적의 이름을 땄고, 신곡리는 신읍과 후곡의 이름을 땄으며, 송평리는 자송리와 황평리를 조합해 이름을 만들었다.
고석리는 고초천리와 입석리에서 한 글자씩 땄고 용곡리는 용두과 명곡을 조합해 마을이름을 정했으며, 용촌리도 용상과 신촌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유래와 전혀 다른 한자어를 사용해서 만든 마을지명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보은읍 이평리와 산외면 이식리, 그리고 탄부면 구암리, 산외면 구티리이다.
이평리는 지형이 배처럼 생겨 뱃들 또는 주평리라 불린 곳이다. 옛날 동네가 형성될 즈음에 동네에 큰 전나무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배의 돛대와 같아서 배의 모양을 떠올려 주평리라 했던 것. 그러나 1914년 일제강점기 이평(梨坪)리 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다.
산외면 이식리도 마찬가지. 배쉰개, 배진개, 주식포(舟息浦), 주포(舟浦)로 불리는 곳이다. 속리천이 마을 앞으로 흘러서 배가 쉬었으므로 배쉰개 또는 배진개, 주식포, 주포라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14년 일제에 의해 이식(梨息)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북 구(龜)가 아홉 구(九)로 바뀐 지명은 두 곳에서 나타난다.
탄부면 구암리는 옛날 사람들이 귀바우(구바우), 거북바우라 불렀다. 지명의 유래는 이상규씨 집 마당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이조말엽까지 구암(龜岩)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폐합시 중관리와 하관리를 병합해 구암(九岩)으로 바꿨다. 큰 바위가 9개가 있었다는 게 그 이유다. 일제에 의해 바위가 아홉 개 있는 마을로 이름이 바뀐 구암리의 아홉 개 바위는 1979년 경지사업으로 큰 바위 3개가 매몰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상배 이장에 의하면 현재 남아있는 바위는 이상규씨 집 마당에 1개, 집 밖에 1개, 두 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외면 구티리는 원래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 거북이와 같다고 해서 구티(龜峙), 거북티라 했던 곳이다. 그러나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시 아홉 구로 한자를 바꿔 구티(九峙)리로 변경됐다.
(▶다음호에는 새로운 마을 이름을 정하면서 사용한 한자어나 음은 같지만 한자어 변경이 요망되는 마을, 또는 주변마을, 중심마을을 통합하면서 전혀 다른 이름으로 변경된 마을 중 다시 개정하면 좋을 것 같은 지역을 찾아 보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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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진 2022-05-04 17:56:07
송진선 기자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전남 나주시 다시면 수다면 "다"와 시랑면의 "시"로 개칭하여
108년 동안 불려지는 다시는 일어사전에 의하면 사무라이를 모시는 곳 지명이 부끄럽습니다.
이곳도 기사화 해주실것을 제보드립니다.
010 2489 2034 작은 도서관장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