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세 수리시설관리원 이학대 어르신
79세 수리시설관리원 이학대 어르신
  • 류영우 기자
  • 승인 2011.04.07 09:07
  • 호수 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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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물어도 걱정, 비가 많이 와도 걱정
▲ 79세의 수리시설관리원 이학대 어르신.

전화기 너머로 느꼈던 분위기와는 분명 달랐다.
저녁 늦게 어렵게 통화가 됐을 때 이학대(79) 어르신의 목소리는 여느 어르신들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많이 지쳐보였다.
아침 일찍 마을 앞 하우스에서 만나자는 말이 알람을 맞춰 놓았던 것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햇볕이 제법 따갑게 내리쬐던 6일, 삼승면 우진리 이학대 어르신의 댁을 찾았다. 하지만 마을 어느 곳에서도 어르신은 만날 수가 없었다.
집에도, 어르신이 말씀하신 마을 앞 하우스에서도.
마을 주민들로부터 아침 일찍 민들레를 캐러 나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발길을 돌렸다.
우진리를 떠나 보은읍으로 차를 몰고 10여 분을 갔을까?
도로변에 오토바이를 세워 두고 비료포대에 무언가를 열심히 캐 담는 한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학대 어르신 아니세요?"
"그런데."
도로변에서 민들레를 캐던 어르신은 마을에서 어르신을 한 참 찾았다는 설명을 듣고서야 전날 저녁에 했던 약속을 기억해 냈는지, 미안한 웃음을 내 비쳤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이학대 어르신의 모습은 80을 바라보는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건강했다.
전날, 많이 지쳐보였던 목소리와는 분명 달랐다.

 

#1.
수리시설관리원. 옛 말로는 수로감시원, 줄여서 수감원이라고 했다.
농어촌공사에서 운영하는 양수장 가동, 저수지 수문개방, 용배수로 수문관리, 기타 농업기반시설물 관리 등이 수리시설관리원의 구실이다.
이학대 어르신은 수리시설관리원이다. 우리고장에서 활동하는 57명의 수리시설관리원 중 최고령이다.
60세 전후에 시작했으니, 이제 20년이 다 됐다.
"젊었을 때는 농사를 졌지. 6남매를 다 농사져서 키웠어. 그러다 20년 전 수리시설관리원 일을 시작했어.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도 조절해야지, 작은 연못에서 내려오는 물도 조절해야지,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은 물론 보청천에서 내려오는 물도 조절해야 해. 쉽지 않은 일이지."
쉽지 않아 보였다.
삼승농공단지에서부터 우진리까지, 수십 개에 이르는 수문을 관리하는 것이 이학대 어르신의 일이다.
오토바이를 타고 한 바퀴씩만 돌아도 족히 한 시간은 넘게 걸리는 듯 했다.
5월부터 9월까지 월 40만 원 정도의 수입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2.
결코, 세월만 보내는 일은 아니다.
가물어도 걱정, 비가 많이 내려도 걱정이다. 그래서 이학대 어르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일기예보는 꼭 본다.
"내일 낮에 비가 온다고 하면 밤중이라도 나가서 수문을 잠가 놓아야 해.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면 큰일 나지. 한 번은 소나기가 내리고, 천둥번개가 칠 때 수문을 잠그러 돌아다녔어. 삽자루를 들고 다녔는데, 번개가 내리쳐서 얼마나 놀랬는지 몰라. 그래서 미리 미리 준비하지."
단순히 수문관리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로 주변 나무나 풀베기도 이학대 어르신의 몫이다.
"바람 불어 나무가 쓰러져 수로를 막기라도 하면 큰일 나지. 풀들이 엉켜 수문을 막아도 그렇고. 도랑이 넘치기라도 하면 정성스럽게 지어 놓은 한 해 농사 다 망칠수가 있거든."
뿐만 아니다.
수로를 관리하면서, 물이 부족한 논이 있으면 채워주고, 또 물이 많은 논이 있다면 물을 빼주는 것도 이학대 어르신의 일이다.
"20년인데, 이제 물대는 대는 전문가지. 돌아다니다가 부족하거나 너무 물이 많은 논을 보면 알려주곤 해. 다 동네사람들이니까."

 

#3.
올해가 마지막이라고 했다.
사실 올해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20년을 겪어온 어르신의 손길을 잊지 못한 주민들이 간청을 했다.
"솔직히 이제는 조금 힘에 부치네. 수로관리 뿐 아니라 논농사와 파 등 집 앞 텃밭에서 채소도 키워야 하니까. 친구들도 그래. 놀러나 다니지 뭐 하러 그렇게 붙잡고 있냐고. 하지만 내가 안하면 안 되는 걸 어떡해."
매일 매일 수로를 관리하느라, 그렇게 좋아하던 게이트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치러 나간다. 그 흔한 여행도 안 해본지 오래다.
하지만 수리시설관리원 일은 올해도 맡은 만큼 결코 소홀히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올해만큼은 정말 풍년이 되었으면 좋겠어. 지난해에는 가물어 애를 좀 먹었거든. 가물지도 않고, 또 비도 좀 적당히 내리고. 둑 어디 어디가 터져 큰일났다라는 얘기, 올해만큼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어."
잠시 틀어 놓았던 수문을 다시 잠갔다.
둑 위에서 넓은 들녘을 바라보는 이학대 어르신의 바람이 읽힌다.
올 가을, 풍성한 들녘을 바라보며 웃음 짓는 농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일 년 농사를 지어 송아지 한두 마리 정도는 너끈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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