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00번째 설을 쇠는 이귀예 할머니
올해로 100번째 설을 쇠는 이귀예 할머니
  • 송진선 기자
  • 승인 2011.01.27 10:14
  • 호수 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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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 모두 건강하고 무탈한 것이 소망이여"
▲ 경로당에서 동네 할머니들과 담소를 나눈 이귀예 할머니가 집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비록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지만 걷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다. 진정한 건강 100세 어르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폭설로 보은군의 차량들이 설설 기던 지난 25일 신묘년 설을 쇠면 딱 100살인 이귀예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회남면 법수2리 우무동을 찾았다.

전날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는 할머니께 전화로 어디 가시지 말고 꼭 집에 계시라는 당부를 했는데, 그 말을 새겨들으시고 출타를 하지 않으셨다. 정말 다행이었다. 잘못하면 회인에 있는 효나눔센터에 가서 이귀예 할머니 어디 계시냐고 찾아다닐 수도 있었고 자칫 길이 어긋나 센터에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으면…. 아찔할 뻔했는데 할머니가 너무 고마웠다. 가는귀를 먹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렀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큰 소리로 질문을 해 취재를 마쳤을 때는 목이 쉬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지팡이에 의지하지만 두발로 건강하게 가고 싶은데 대로 다니시는 건강한 100세 할머니의 100살 인생, 100번째 설을 맞는 소감을 들어본다.

 

# 옛날이 설쇠는 맛이 있었지
지금도 이것저것 차례음식을 준비한다고 해도 가진 것 없고 음식도 흔하지 않았지만 옛날이 더 설 쇠는 맛이 있었지. 이귀예 할머니는 옛날 설 풍경을 그림을 그리듯 추억을 끄집어냈다.

없는 살림이지만 오래 전부터 설음식으로 식혜를 해놓고 수정과도 미리 달여 놓고 묵도 쑤고 두부도 해놓고 가래떡을 뽑아 썰어놓는다구. 전날 적을 부치고 나물 무치면 되었지.

지금에야 설탕이 있지만 설탕이 귀하고 쌀도 귀한 시절에는 수수를 타서 수수가루와 엿기름 가루를 섞어 물을 넣고 끓여 삭힌 후 또 끓이는 고정을 거쳐 자꾸 달이면 조청이 되지. 흑설탕 빛이 나는 조청을 한 종지 따라 상에 놓아 시루떡을 찍어 먹었어. 아주 달고 맛있어.

우리는 그것도 먹기 힘들었어. 뭐 양이 나와야지. 시어른하고 자식들 챙겨주면 내 입까지 올 수가 없었어. 만들 때 맛보는 것이 고작이었지. 항상 달려서 그런지 아쉬운 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

지금은 누가 조청을 달이고 하겄어. 힘은 들어도 그렇게 설 음식을 준비했었지. 설 분위기가 났어.
아참 음식을 만들기 전에 설을 쇠려면 이불빨래 다하고 솜바지, 저고리 다 뜯어 빨고 풀을 먹인 후 다듬이질로 빳빳하게 만들어 다시 바지, 저고리를 지었어. 골무를 끼고 바느질을 해도 손가락이 아플 정도였지.
지금 이렇게 설을 쇠라고 하면 다 도망갈겨. 그래도 우리네는 그렇게 살았어. 그렇게 사는 줄 알았지 뭐.
우리는 이제 대전에 사는 큰아들(김수철씨, 67) 집에서 설을 쇠는데 손자들이 데리러 와.  며느리가 음식을 잘 차려. 누가 다 먹으려고 이렇게 많이 하느냐고 내가 성화를 댈 정도로 잘 차려. 고맙지 뭐.
무슨 덕담을 하냐구? 덕담이 뭐 있겠어? 자식들하고 손자들이 어머니,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하면 나는 괜찮다 니들이나 건강하게 잘 살아라 하지 뭐.
그러면서 하얀 백발의 백세 할머니는 치아가 없는 잇몸을 드러내며 고운 웃음 짓는다. 그 모습이 어찌나 평화로운지.

 

#사는 게 정말 힘들었어
이귀예 할머니의 설 추억은 6, 70대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들의 설 풍경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입하나 덜자고 시집보내고 노동력이 부족해 사람들 들이던 그때 대전에 살던 이귀예 할머니는 17살 때 동갑내기 광산 김씨 신랑(고 김용문)에게 시집왔다.

변변한 땅 한 뙈기가 없는 어려운 형편에 2남3녀의 자식들과 먹고 살겠다고 경기도 오산까지 갔었다. 그리다 한국 전쟁 때 이귀예할머니 가족들은 고향인 법수2리 우무동으로 피난을 와서 정착했다. 남편은 고향에서 4년 더 산 후 저녁 잘 먹고 잠자듯이 하늘나라로 갔다.

맨 몸뚱이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할머니는 대전까지 40리길을 걸어가 그릇을 떼다 밤늦도록 회남, 회인지역을 행상하며 살았다. 한 밤중에 인적없는 어부동 고개를 넘어올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설정도로 무서웠다. 그래도 자식들 입에 풀칠이라도 시키기 위해서는 무서움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험하게 일했는데도 자식들은 겨우 초등학교밖에 보내지 못했다. 자식들 학교 얘기 할 때 할머니의 목소리는 풀이 죽었다. 그때는 다들 그랬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논 4, 5마지기를 사서 농사를 지어 밥은 먹을 수 있는 밑천은 만들었다. 지긋지긋한 행상은 1980년 대청댐이 조성되고 회남면 마을들이 수몰된 후 그만 뒀지만 그 다음은 산나물 채취를 위해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이른 봄부터 고사리 등 산나물을 뜯어 대전까지 나가 팔았다. 산을 잘 탄 할머니는 부지런하기까지 해 잠시도 쉬지 않고 산나물을 뜯어 팔아 살림에 큰 보탬이 됐다. 이조년의 시조 '이화에 월백하고'중 '다정도 병인 양 하여…'라는 구절이 있는데 할머니는 부지런함이 병일 정도였다. 하지만 젊었을 때 행상으로 걷고 산나물 채취를 위해 등산을 한 것이 건강증진효과가 있었는지 할머니는 93, 4살 때 까지 산나물을 뜯었다고 한다.

고사리를 뜯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친 것이 산나물 채취를 그만 둔 이유다. 그때 허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만 허리 외에는 크게 아픈 데가 없다고 한다. 만약 그 때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100살인 지금도 산나물을 뜯으실 기세다.

#잠자듯이 가는 게 소원이여
지금도 새벽 5시면 기침을 하고 방을 쓸고 닦고 마당을 쓸고 속옷과 양말을 빨고 아침밥을 해먹는다. 취재를 간 날 폭설에도 할머니는 마당은 물론 집으로 오는 동네어귀까지 쓸었다고 한다. 경로당에서도 오래 앉아있지 않고 어느새 지팡이를 짚고 나가신다고 한다. 이 추운데 어딜 가느냐고 하니까 그냥 동네 한 바퀴를 걷는다고 하신다. 여간 부지런 한 게 아니다.

머리도 자주 감는다. 머리를 안 감으면 냄새도 나고 가려워서 자주 감는 것이라고 한다. 목욕도 자주 한다. 요즘도 더운물 받아놓고 몸에 끼얹는다. 춥긴 하지만 목욕을 하면 시원하다고. 그래서 할머니 방안에서는 특유의 노인 냄새가 나지 않는다. 참 정갈하시다. 요즘 어린이들이 "할머니 냄새 나"하며 가지 않는다고 한다는데 이귀예 할머니는 예외일 것 같다.

"우리 바깥양반이 저녁 잘 잡숫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지 않았어. 허망하긴 했지만 어디 아픈데도 없이 하늘나라로 갔지 죽는 복을 타고 난겨 나도 살다보니 100살이나 됐어. 남 도움 없이 내 혼자 대소변 가리며 이렇게 살다 저녁 잘 먹고 잠자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가는 게 소원이여."

할머니는 자식을 앞세울까 그게 걱정이라고 말했다.
혼자사시는 할머니가 걱정돼 대전에 사는 큰 아들은 거의 매일 우무동 어머니께 들른다. 혼자 사시는 것이 걱정돼 대전으로 모시기도 했는데 감옥살이 갔다며 하도 성화여서 할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모셨다.

지난 25일에는 설날 가래떡을 뽑기 위해 쌀방아를 찧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께 올릴 설 차례상을 준비하는 것이다.
큰 아들은 조상께 차례를 지내며 어머니 이귀예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할 것이다.

정겨운 모자지간의 보습을 보니 이귀예 할머니는 자식복도 타고 난 것 같았다. 100번째 설을 맞는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며 고요한 우무동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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